후추 명예의 전당 - 박주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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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0 16:37
‘리아모’는 누구일까요?
‘서윤희’라고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99년 7월 12일, 미얀마 양곤. 한국 주니어 대표팀 ‘준준결승’ 안착. 그러나…
지난 1년간 언론에 소개되었던, 몇 가지 ‘배드민턴’ 관련 기사 헤드라인들이다. 우리나라 배드민턴의 현실이다. ‘리아모’. 그는 중국 국가대표팀 단식 전문 코치였지만, 현재는 우리나라에서 우리 대표팀 단식 전담 코치로 월 3천불씩 지급을 받고 있다. 그렇다. 우리 배드민턴이 현재 중국인 코치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
‘서윤희’. 무슨, 미스코리아 출신 여자 연예인? 아니다. 서윤희는 올해 중학교 3학년의 ‘배드민턴 천재’이다. 소위 ‘스포츠 광’이라는 후추 독자들에게마저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 이게 바로 우리 나라 스포츠팬들이 배드민턴에 보이는 통상적인 ‘관심’이다.
지난 7월. 99년 아시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리나라 주니어 대표팀은 단 한 명도 결승에 진출한 선수가 없었다. 꼭 ‘결승’, 또는 ‘금메달’에 목숨 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 나라 청소년 대표 축구팀이, 세계대회도 아닌, 아시아권 대회에서 줄줄이 ‘준결승행 좌절’이란 기사가 나왔더라면, 아마도 축협 전화통엔 또 불이 났을 것이다. 그렇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서 ‘축구의 금메달’보다 더 확실한 ‘금메달 후보’로 인정 받고 있는, 대한민국 배드민턴 ‘미래’의 현주소이다.
우리나라 배드민턴계에 평상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항상 ‘용서’가 되어왔다. 왜? ‘비인기 종목’ 이니까. 그 한마디로 매사가 해결되어왔다. ‘비인기 종목’… “야, 축구 대표팀 승패나, 이승엽이 홈런 신기록 달성 여부도 제때 알기 바쁜데, 배드민턴까지 내 무슨 수로 알겄냐?” 이를 보고 아무도 욕하는 사람 없다. 후추 역시, 지금 당장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런 팬들의 평소 ‘불감증’이 ‘죄악’으로 변하는 시점은 바로 올림픽 때이다. 내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배드민턴 선수들이 만에 하나라도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다면, 그때는 ‘누구 모가지’가 날라갈 지 아무도 모른다. 언론에선 또 무슨 ‘막판 승부욕 부족’, ‘꿈나무 육성 계획 결여’, ‘진부한 훈련 방식’…등등의 더러운 꼬투리를 잡아가며 ‘분위기 조성’을 할 것이고, 4년 내내 코방귀 한번 안 뀌던 일부 팬들은, 그것에 또 동요되어서 ‘우리 나라 배드민턴은 박주봉이 이후로 끝났어…’ 하며 등을 돌릴 것이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스폰서들은, 팬들이 관심 없는 스포츠에 대한 투자에 또 한번 궁색해 질 것이고-… 바로 이것이 4년마다 계속되는 우리나라 아마츄어, 아니 ‘비인기 종목'의 애환’이다.
요 대목에서 후추가 내린 결론은, ‘우리나라 배드민턴 선수들은 잘 하는 정도를 뛰어 넘어, 완전히 미쳤다’ 이다. 그만큼 ‘약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 배드민턴 선수들이다.
후추 명예의 전당 제3호 헌액자로 박주봉 선수, 현 말레이시아 배드민턴 대표팀 코치를 선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후추의 아주 작은 목소리로나마,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 대한 팬들의 관심도를 배가시키고 싶어서이다. 왜?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4년마다, ‘파렴치한’ 인간들이 되기 때문이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 항상 언론이나 일부 팬들은 ‘효자 종목’으로 배드민턴을 꼽기 마련이다. 그런 ‘효자 짓’하는 자식들에게, 우리만큼 ‘애정 없는 부모’도 드물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관심을 보이란 말이냐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후추 역시 인정한다. ‘시청률 타령’만 하는 우리나라 방송사에서 그런 ‘비인기 종목’ 경기가 언제 어디서 열리는 지, 상냥하게 알려줄 리 없으니까. 그럼 뭐냐? 최소한, ‘은메달’이라도 따고 돌아오는 그 선수들에게 돌을 던지지는 말자는 얘기다. 일부 축구 팬들은 올림픽, 월드컵 같은 ‘빅 이벤트’가 2개씩이나 있는 축구를 위해 투자하는 돈은 아직까지도 부족하다고 한다. 물론 다른 축구 강국들의 투자 수준을 볼 때,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소위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노숙까지 해 가며 축구경기 티켓을 사려고 기다리는 축구 팬들을 바라 보면서 가장 간절하게 부러워 하는 것은, 아마도 ‘돈 투자’가 아니라, 그런 팬들의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팬들이 바라보는 ‘비인기 종목’의 시각과 관심이 바뀌어야 한다. 아니, 이제는 그런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좀 ‘못’ 해도, 우리 팬들은 할 말이 없게 되었다. 황선애, 박주봉, 김문수, 유상희, 김연자, 정명희, 정소영, 방수현, 김동문, 나경민… 등과 같은 수 많은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팬들에게 기쁨과 ‘금 덩어리’를 가득 안겨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팬들의 애정은, 집 나간 ‘바둑이’를 우연히 만났을 때 정도의 그것 밖에 안되니 말이다.
‘세계의 황제, 한국의 머슴 - 박주봉’
어떤 스포츠 팬에게 ‘박주봉’ 하면, “누구? 쿠웨이트 박?” 하고 반문을 할 정도로, 박주봉의 존재는 우리 머리 속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진 않다. 지난 십 수년간 그의 이름 옆에 항상 따라 다니던 수식어, ‘배드민턴의 교과서’, ‘셔틀콕의 제왕’, ‘복식황제’… 등등을 들어 오면서, 필자 역시 아주 막연하게, ‘정말 배드민턴 잘 하는 선수’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점을 고백한다. 하지만, 후추 명예의 전당 후보자로 그의 업적, 기록, 그리고 성장과정…등을 면밀히 조사 하면서, 박주봉의 ‘위대함(Greatness)’에 대한 새로운 ‘경이’를 갖게 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배드민턴 강국들인 동남아나 유럽에선 그의 지명도가 도무지 어느 정도이길래, 해외에서 그렇게까지 ‘박주봉~ 박주봉~’하고 난리를 떠는지?... 알아야만 했다. 아주 간단 명료, 그리고 시원 삼빡하게 말하자면… 세계가 바라보는 ‘배드민턴의 박주봉’은, 우리 국민들이 ‘축구의 펠레’, 또는 ‘육상의 칼 루이스’ 쯤을 바라보는 시각과도 같다고 생각하면 정확할 것이다. 올림픽 말고는 제대로 배드민턴 중계조차 안 해주는 국내 방송의 현실 때문에, 테니스나 골프와 같이 배드민턴에도 ‘그랜드 슬램’이 있다는 사실조차 우리는 모르고 산다. 동남아 국가들처럼 자기나라 선수들에게 ‘일방적이고 열광적인’ 지지 (지난 방콕 아시안 게임 때, 다들 이미 목격했겠지만)를 보내는 사람들 역시, 박주봉의 ‘마술’ 앞에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세계 최강대국 미국조차 은근히 깔보는, ‘자존심의 지존’ 유럽인들도 박주봉의 ‘세기’에 혀를 내둘렀다. 반면, 우리나라 피가 펄펄 끓고 있는 박주봉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시각은, 국제대회 나가서 종종 메달 따오는, 그저 그렇고 그런 ‘비인기 종목 선수들 중에 하나’쯤이 아닌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의 이런 ‘무지함’ 때문에, ‘살아있는 전설? 박주봉’은 지금 이 시각 말레이시아의 한 체육관에서 그의 ‘후계자 양성’이 아닌, ‘엄한’ 말레이시아 선수들을 열심히 조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잘 하는 소리로, ‘그저 곁에 있어만 줘도 고맙다.’라고 한다. 우리가 영원히 사랑하고 아껴줘야 할만큼, ‘Korea’를 빛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들려 줬던 선수들. 우리나라가 배출 해낸 ‘세계적인 스타’들이 왜 하나 둘씩 바다를 건너 쓸쓸한 이국 땅에서만 기억되고, 존경받고, ‘재활’되어야만 하는지… 우리나라 축구 팀이 ‘베켄바워’를 감독으로 영입하게 되는 영광 정도의 ‘특혜’를, 현재 말레이시아 배드민턴 대표팀은 박주봉을 통해서 누리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배드민턴 팀은 현역시절 ‘박주봉의 밥’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중국 '애'들한테서 지도받고 있는 판국에 말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비 인기 종목’ 선수들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관심이 점점 식어갈 때, 박주봉이 보여줬던 ‘신기’는 우리의 몫이 아닌, ‘그들의 몫’이 되어 버릴 것이고, 나아가서는 ‘효자이기는 하지만 인기 없는 종목’ 그 자체도 우리 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국내 팬들이 ‘박주봉의 전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꼭 팬들의 잘못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젠 진정으로 그의 ‘위대함’을 누군가는 밝게 비춰줘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한국인 박주봉’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 석자를 ‘후추 명예의 전당’에 영원히 헌액시킨다.
‘배드민턴 신동 박주봉’
언젠가 ‘세계 테니스계의 큰별’ 존 맥캔로의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난다. 자기 키보다도 더 커 보이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비교적 정확하게 공을 맞추는 그의 어린 모습을 담은 흑백 릴(reel) 테이프 였다. 필자는, 박주봉의 ‘어린 시절’을 취재하면서 언젠가 보았던 그 ‘흑백 화면’을 자꾸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타이거 우즈, 마라도나, 그리고 캔 그리피 주니어...와 같이, 어렸을 적부터 소위 ‘천재성’을 타고 난 외국의 대 스타들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부러워’ 한 적이 있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런 믿기 어려운 ‘천재성’을 지닌...박주봉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주봉의 배드민턴 ‘입문’은, 앞서 언급한 그런 ‘세계적인 스타’들의 그것처럼, ‘천리안’을 가지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박주봉의 부친 박명수(67) 선생은, 말 그대로 평생을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숨쉬며 살아 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6척 거구’ (186 cm) 라는 표현이 전혀 손색없을 만큼, 워낙 탁월한 신체 조건을 타고 나셨고, 고등학교 시절 연식정구 선수로 뛰었던, 정말로 경험이 풍부하셨던 ‘스포츠맨’ 아버지를 둔 이점을 톡톡히 본 셈이다. 4남2녀 중 ‘막내둥이’로 태어난 박주봉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승부욕’을 과시했다. 동네 꼬마들과 한번 맞붙은 ‘구슬치기’나 ‘딱지치기’에선 왠만하면 져본 일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항상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들을 상대했고, 무슨 일이든 ‘지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다.
교직생활을 하시던 아버님의 점심 도시락을 배달(?)하기 위해, 여섯살 난 박주봉은 매일같이 전주 풍남 국민학교에 등교를 했다. 점심시간 중에, 어린 학생들과 배드민턴을 치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는 배드민턴의 '첫경험'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지도하시던 풍남 국민학교 배드민턴부 선수들과 함께 어울려서 라켓을 처음 잡아본 그는. 그로부터 일체 다른 놀이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죽어라고, 정말로 죽어라고 배드민턴 라켓만 손에 쥐고 놓질 않았다. 너무나도 어린 주봉이었지만, 셔틀콕을 맞히는 재주가 남달랐고, 국민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는, 방과 후에도 얼른 숙제를 끝내고 곧바로 라켓을 휘두르는데 열중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풍남국교 배드민턴부 정식 선수로 선발되고, 곧 이어 5학년 때, 처음 출전했던 제2회 소년체전(부산)에서 당당히 ‘단체전 우승’이라는 놀라운 스타트를 끊는다. 하지만, 이듬해 배드민턴을 비롯한 일부 종목들이 소년체전에서 사라지게 되고, 한참 배드민턴에 빠져 있었고,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소년 박주봉에게 일대 ‘고민’이 시작된다. 풍남학교 배드민턴부는 해체되지만, 이때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체육에 대한 비전’과 ‘아들의 실력에 대한 신뢰’ 덕분에, 그는 ‘개인 훈련’을 하며 6학년 시절을 보낸다. 당시, 실내 강당이 없어서 풍남학교 강당에서 연습하던 전주농고 선수들의 ‘잔심부름’을 해가며 말이다.
그리고 곧 그는, 서울에서 열렸던 종별 선수권 대회에 홀로 출전, 또 한번의 우승을 따 낸다. 전주 서중학교 시절 박주봉은, 1학년 때부터 중3 선배들과 연습을 하고 시합을 했을 정도로 기량이 돋보였고, 출전했던 대회란 대회는 모조리 휩쓸었다. 한마디로 ‘스타의 탄생’이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한 박주봉을 스카우트해 가려는 고등학교는 여럿 있었지만, 당시 전북의 배드민턴 명문 전주농고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박주봉은 고교 진학을 앞두고 또 한번 거취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여기서 박주봉의 부친, 박명수 선생의 믿기지 않는 ‘통찰력’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0년 전에 이미 그는, ‘대한민국 학원 스포츠의 병마’에 대해서 정확히 예지하고, ‘공부를 뒷전으로 하는 운동’에 대해선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셨다. 중학교 시절에도 전주 서중 교장선생의 배려로, ‘국, 영, 수’만은 수업시간을 조정하면서까지 듣게 하였고, 방과 후 저녁시간에는 ‘특별과외’를 받아 가면서 학교 공부를 소홀하지 않게 하였다. 당신이 한 평생 교직 생활을 하셨기 때문인지, ‘운동은 평생 할 수 없는 것’이란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 아무리 독보적인 ‘배드민턴 신동’ 박주봉이었지만, 비교적 운동 선수들의 학업 참여를 ‘가볍게’ 배려(?) 하던 전주농고에 입학하는 것을 너무나 속상해 하시던 박명수 선생이었다. 당시, 이런 박주봉을 위해서 명문 전주고에 배드민턴부를 창단한다는 계획까지 있었지만, 없던 일로 돌아갔고 결국엔 전주농고에 입학하게 된다. 모름지기,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 부모님의 학업에 대한 열성이, ‘자식 스타 만들기’의 그것에 반만 되더라도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은퇴 선수들의 ‘무기력함’은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관점에서 박명수 선생은, 운동선수 부모로서의 훌륭한 벤치마크(benchmark) 대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배드민턴의 쿠데타 (Coup d’Etat)
박주봉이 전주농고에 입학하자마자, 대한민국 배드민턴 역사의 한 페이지는 새롭게 장식되고 만다. 1980년 대구에서 개최되었던 전국 종별 선수권 대회 준준결승. 광주일고 3학년 배드민턴부 주장이자, 당시 고교 랭킹 2위였던 안상우 선수를 맞아, ‘까까머리 고1’ 박주봉은 체력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적게 뛰는’ 시합을 주도. 2:0 이라는 완승을 거두게 된다. 코치, 부모님들 마저 ‘안상우한테는 힘들다.’ 라고 포기했던 경기였지만, 박주봉은 위기 때마다 고1답지 않은 테크닉과 승부 근성을 선보이며, ‘골리앗 안상우’를 격파한다. ‘완벽한 두뇌 플레이의 개가’라고 당시 배드민턴 인들은 평가 했고. 이후, 준결승에서 맞붙은 고교랭킹 3위 서성민, 그리고 결승에서의 김창국 등의 ‘선배’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고등학교 진학 후, 첫 전국대회 우승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또한, 이 대회에서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곧바로 박주봉의 가슴엔 ‘태극마크’가 달려진다.
처음으로 국가대표 선수가 된 박주봉의 첫 국제무대는 이웃나라 일본에서 열렸던 ‘한-일 고교 선발 교환 경기’ 였다. 5명씩 출전하는 단체전에 출전한 박주봉이 ‘한국 고교 랭킹 1위’를 달고 나왔고, 대회 규정 상, ‘랭킹 1위 대 랭킹 1위’가 맞붙어야 하는 상황에서, 당시 일본측 배드민턴 관계자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무리 친선 경기지만, 너무나 ‘승리’에만 집착한 한국 선수단은 고등학교 1학년짜리 풋내기 선수를 랭킹 1위로 속여서 일본 랭킹 1위와 대결 시켜 그 경기는 포기하게 하고, 나머지 4경기를 독식하려고 한다’는 비난이었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애들의 이런 성급한 ‘호들갑’은 풋내기 박주봉의 ‘신들린 플레이’로 말끔히 사라지게 된다. 일본 랭킹 1위 선수와 붙어서 깨끗한 승리로 장식을 했으니 말이다. 당시, 우리보다 한수 위에 있었던 일본 배드민턴계는, 박주봉 덕분에 아주, 제대로 ‘쑈크’를 먹게 되고, ‘세끼네’라고 하는 일본 배드민턴 협회 관계자는 어린 박주봉의 현란한 ‘두뇌 플레이’를 보면서, “저런 어린 선수가 저 정도의 두뇌 플레이를 구사한다면, 앞으로 일본 배드민턴은, 한동안 한국을 꺾기 힘들 것이다”라고 예언한 바 있다.
1980년 일본에서의 ‘박주봉 신드롬’은, 그 후 10년 아니 15년 가까이 계속 되어온 박주봉의 ‘세계적인 명성의 서곡’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은 그 후로, 한국과는 배드민턴에서 ‘쨉이 안될 정도’로 급락하게 되지만, 그들의 지속적이고 한결 같은 배드민턴에 대한 사랑과 ‘영웅에 대한 예우’는 우리 한국인들의 낯을 뜨겁게 한다. 자국 선수도 아닌 한국 선수 박주봉의 엄청난 플레이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당시일본의 ‘배드민턴’ (‘배도민톤’) 잡지사는, 2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박주봉의 친가에 매월 잡지를 무료 우송해 주고 있다. 어림잡아 240권의 잡지를, 한 달도 빼놓지 않고 매월 박주봉의 전주 본가로 우송해 주고 있다는 얘기다. 누가 부탁을 하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박주봉… 그 후로 그가 보여 준 ‘우승 행진’은, 그 전까지 우리가 보아온 수많은 스타들의 ‘승리’ 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Made in Korea’ 마크를 달고 뛴 그 어떤 선수의 커리어보다도 완전한 ‘독식’이었고, 동남아, 유럽에서 그의 인기는 국내팬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아주 간략하게나마 ‘박주봉의 전설’을 되돌아 본다.
"박주봉의 전설" - 화려한 경기기록
연도 대회명 성적 비고
1982 30회 덴마크 오픈 우승 복식경기‘처녀출전',한국 배드민턴사에 첫복식 우승!
1983 3회 말레이시아 월드컵 우승 김문수와 처음으로 복식 출전
세계 선수권 동메달세계 선수권 출전 사상 첫 메달 (당시 한체대 1년)
1984 32회 덴마크 오픈 우승
29회 스웨덴 오픈 우승
1985 일본 오픈 우승
75회 전영 오픈 우승 남자 복식의 교과서'란 별명 얻다!
6회 아시아 선수권 우승
4회 캘거리 세계 선수권 우승 남복,혼복 첫 2관왕(김문수,정명희와 한조 이뤄)
1986 86 아시안 게임 우승 3관왕!
1987 대만오픈 준우승첫 단식 출전. '허리부상'으로 분패. 6개월간요양
1988 88 올림픽 시범 경기 금메달 김연자와 한조
1989 말레이시아 오픈 우승 남.복/ 혼.복 싹쓸이 우승!
태국 오픈 우승
월드컵 선수권 우승
전영 오픈 우승
일본 오픈 우승
1990 일본 오픈 우승
전영 오픈 우승
90 북경 아시안 게임 금메달 2관왕
1991 일본오픈 우승
코리아 오픈 우승
21회 세계 선수권 우승
전영 오픈 우승 배드민턴의 '윔블던' 3연패 기록!
제29회 대한민국 체육상 수상 경기부분
기네스 북에 오름 세계대회 최다 우승자(남복 25회,혼복25회)
1992 코리아 오픈 2연패 우승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현역 은퇴후,결혼
1993 세계 혼합 단체전 우승 박주봉-김문수 일시 컴백
한체대 전임강사
1994 배드민턴 용구 'JB' 브랜드 제작 ㈜ 마스만 스포츠와 합작
1995 국제심판 박주봉으로 일시 복귀
배드민턴 특사' 브루나이 왕실 방문, '왕족 지도'
박주봉 컴백 애틀란타 올림픽 대비. 태릉 입촌
홍콩 오픈 우승 박주봉-심은정
중국 오픈 우승
태국오픈 우승 박주봉-나경민
1996 일본 오픈 우승
코리아 오픈 우승
스웨덴 오픈 우승 혼복 랭킹 5위로 올림픽 출전권 획득!
96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 세계랭킹 1위 김동문-길영아 조에 패배
영국 대표팀 코치로 5년 계약
1997 IBF 선정 '허버트 스칠상' 수상 역대 8번째
1999 말레이시아 코치로 임명 IBF 사상 가장 '파격적인 조건'
세계대회 총 70여 차례 우승이라는 통산 업적을 기록했다. 위의 표에서 명시된 대회에서 대부분 2관왕, 내지는 3관왕을 차지했다고 보면 대략 70여 차례의 기록이 나오게 된다.이래도 과연 그가 ‘축구의 펠레’, 그리고 ‘육상의 칼 루이스’에 버금가는 선수란 호칭이 부적합하단 말인가… '대한민국 땅, 전주의 아들 - 박주봉'이었다.
‘주봉버거’는 도대체 뭐냐고?
우리 후추 독자의 수준 정도라면, 아마도 ‘박주봉’ 하면 따라 다니는 ‘주봉 버거, 주봉 쥬스, 주봉 아이스크림’ 정도의 얘기를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소위, ‘전문 스포츠 신문’이라고 떠들어대는 국내 언론들이 박주봉의 ‘해외 명성’을 약간이나마 소개하려고 뿌린 말들이다.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후추 독자들은 궁금하다. ‘주봉버거~ 주봉버거~’ 하는데, 도대체 ‘주봉버거’가 말레이시아의 ‘맥도날드나 롯데리아쯤에서 출시된 ‘준 브랜드’쯤 되는 지, 아니면 무슨 ‘박주봉 골수팬’ 한명이 즐겨먹는 ‘홈메이드 햄버거’ 수준을 말하는 것인지. 그 이상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주봉버거’의 올바른 정의를 내리기 전에, 지난 2년간 박주봉이 거주했던 ‘배드민턴 종주국(?) 영국’, 그리고 말레이시아. 이 두 나라에서의 박주봉을 들여다 본다.
영국에서 열리는 ‘전영 오픈’은 ‘배드민턴의 윔블던’ 만큼 권위 있고 역사가 깊은 대회이다. 그리고, 실제 ‘전영 오픈’은 윔블던의 실내 배드민턴 코트에서 개최된다는 사실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자, 한번 상상해 보자. 우리가 매년 TV에서 지켜보는 윔블던 테니스 대회. 그런 국제적인 ‘그랜드 슬램’ 이벤트에서, 듣도 보도 못한 20대 초반의 한국인 선수가 우승을 했다고 생각해 보시라. 우리 나라 국민들을 비롯한, 전 세계의 테니스 인들은 방방 뜨고 난리가 날 것이다. 1985년 ‘배드민턴의 윔블던’ 전영 오픈에 대한 세계 배드민턴 인구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한가지 다른 점이라곤, 정작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광분’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후로도 남자복식, 혼합복식 경기에서 수 차례 우승을 하고, 89-91년까지 ‘전영 오픈 3연패’라는 ‘무식한 기록’을 달성한 선수가 박주봉이다. 윔블던 테니스에서 엄청난 ‘우승 행진’을 기록한 스웨덴의 ‘뷔에른 보리’, 미국의 ‘피트 샘프라스’, 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같은 선수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들의 눈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경기를 수 년간 보여준 선수들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 표시’이기도 할 것이다. ‘자기네 집 앞마당에서’ 자국 선수는 물론, 덩치가 훨씬 큰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붙었다 하면 맥을 못 추게 만드는 한국의 박주봉 역시 영국인들의 뇌리에는 강하게 남아 있었다.
96년 10월 15일. 박주봉이 조국을 위해 서른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올림픽에 출전하고 난 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영국 배드민턴 협회에서 접촉이 온다. 배드민턴 종주국이란 수식어가 창피할 정도로 당시 영국 배드민턴 대표팀은 심각한 기량 저하를 경험하고 있었고, ‘세계 배드민턴 6강’의 척도였던 ‘A 블록(Block)’ 군에서 밀려나가 버린 것이다. ‘배드민턴의 교과서’라고 불리우던 박주봉을 긴급 수혈해서, 영국 대표팀의 기술 향상은 물론, ‘살아 있는 전설’에게서 직접 지도를 받는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 올린다는 계산으로 그를 영입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월봉 약 400만원, 그리고 차량 보조 정도의 그다지 빠방한 ‘금전적 조건’은 아니었지만, 박주봉을 영국으로 몰고 간 결정적인 이유는, 영국측이 제시했던 ‘학업 보조’ 내용이었다. 박주봉 부부 모두를 주 2회 랭귀지 스쿨에서 함께 영어를 배우게 했고, 그것도 혹시 부족할까봐 개인교습을 주 2회 지원했다. 영국같이 ‘짜기로’ 소문난 나라에서, 어마어마하게 비싼 ‘개인교습’을 지원해준 것을 보면, 계약 조건이 금전적으로도 그리 나쁘지 만은 않았을 뿐더러, 어릴 적부터 ‘교육열’이 남달랐던 박주봉을 ‘꼬시기엔’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 대표팀 전임 코치로 1년을 마칠 즈음, 박주봉의 영국 대표팀은 A Block권으로 재진입 하였고, 영국뿐만 아닌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도 틈만 나면 ‘러브콜’을 받았다. 휴가라도 받게 되는 날이면, 그는 덴마크, 스웨덴등으로 ‘우정출연식 강연’을 하기 일쑤였고, 잦은 해외 전훈등의 이유로 그가 처음에 계획했던 영국에서의 ‘박사과정’은 서서히 멀어져만 갔다.
올해 초, 말레이시아 배드민턴 협회로부터 대표팀 감독직 제안을 받고, 지난 7월 말레이시아행 결정을 영국 대표팀측에 통보한다. 이때 영국 배드민턴 협회측의 반응은, 그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배드민턴 영웅 박주봉’에 대한 애정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당신이 말레이시아에서 그런 파격적인 조건으로 지도자 생활과 공부를 겸할 수 있다면, 우리쪽에선 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는 유념하길 바란다. 그 쪽 동남아 국가들의 배드민턴에 대한 열정은 감히 상상을 초월한다. 혹시라도 성적이 부진하다면, 금새 비난의 대상으로 몰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절대 그렇게 되길 바라진 않지만, 만약에라도 말레이시아를 떠나고 싶어진다면, 언제든지 영국으로 돌아와 주길 바란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대표팀 지도자 자리를 만들겠다”하면서 떠나는 박주봉을 위해 성대한 ‘송별회’를 열어 주었다.
1983년, 김문수 선수와 처음으로 한조를 이뤄서 출전했던, 제3회 말레이시아 월드컵 대회에서 박주봉은 말레이시아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승부를 제공하고, 그 후부터 ‘말레이시아의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게 된다. 79년부터 ‘말레이시아의 박찬호’ 정도의 사랑을 받아 오던, 말레이시아 배드민턴계의 거목 ‘시덱 형제’를 격침시켰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 편이라도, 마치 ‘예수님’ 정도로 생각해 오던 ‘시덱 형제’를 상대로 너무나도 훌륭하고 깨끗한 플레이로 그들을 제압한 박주봉-김문수 조에게 결국엔 말레이시아 국민들도 두 손을 든 셈이었다.
축구, 그리고 배드민턴이 ‘국기’로 알려진 말레이시아는, 특히 배드민턴 경기가 있는 날이면 택시 기사에서부터 노점 상인들까지, 일제히 귀에다 라디오를 갖다 대고 ‘광적으로’ 자국 선수들을 응원한다. 국방부 차관이 현 배드민턴 집행부 회장직을 겸하고 있고, 말레이시아 배드민턴의 1등 후원자는 바로 말레이시아 수상의 부인이라는 말도 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름은 몰라도 박주봉의 이름 석자는 정확히 발음한다고 한다. 연봉 2억, 아파트, 차량 제공, 국립대학 스포츠 외교학/마케팅과 진학 보장… 등의 엄청난 조건을 받으며 말레이시아 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하기 위해, 박주봉이 지난 9월27일 말레이시아에 입성했을 때, 쿠알라룸푸르 공항에는 40여명의 취재진이 그의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였고, 곧바로 대사 초청 만찬 참여 등의 ‘국빈 대접’을 받고 있다. 현역 생활을 마감한 ‘한국의 감독’을 맞이하는 말레이시아 식 ‘영웅 대접’이다. 상상해 보시라. 정말 우리 같으면, ‘베켄바워’쯤이 우리 축구 대표팀을 지휘하기 위해 귀국했을 때나 있을 법한 얘기가 아닌지… 3년 전, 박주봉이 영국으로 떠날 때, 우리 언론사에선 아무도 공항에 나오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일시 귀국할 때 역시, 그는 텅 빈 김포 공항의 트랩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도 ‘세계의 황제, 한국의 머슴’이 과장된 표현이란 말인가…
약속한대로, ‘주봉버거’에 대한 진상을 밝히려 한다. 신문에서 간혹 소개되어 오던‘주봉버거’란? 상상 했던 것처럼, 무슨 햄버거 회사에서 박주봉과 계약해서 ‘준 브랜드’를 만든 것은 아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같은 ‘배드민턴 강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대회에 박주봉이 참가하는 1-2 주 동안, 주최측 체육관 내 상인들이 ‘주봉 버거’, ‘주봉 아이스크림’, ‘주봉 주스’ 라는 애칭(nickname) 을 달아서 판매를 했고, 그런 ‘깜짝 상품’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응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그 장사꾼들은 엄청난 ‘박주봉 특수’를 누린 셈이다. 이렇게 단발적인 상품이었지만 , 박주봉이 현역 시절 약 15년 동안, 동남아에서 경기에 출전하고 훈련했던 나날들을 계산해 보면, 어림잡아 1년에 2-3개월은 될 테니까, 그 매출 상승 효과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임은 분명하다. 쉽게 말해서 대충 이런 식이었다. “자~~ 주봉 버거 있어요ㅡ 주봉 버거… 박주봉이 펄펄 나는 이유… 바로 이 주봉 버거를 먹고 뛰기 때문입니다… 자~ 주봉 버거가 왔습니다.” 무슨 시장바닥 약장사 같은 분위기지만, 그래도 잘 팔린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우리도 올해, ‘이승엽 캐릭터 상품’ 판매로 대구 야구장 상인들이 톡톡히 재미를 봤다고 한다. 하지만 ‘주봉 버거’의 진짜 가치는, 자국 선수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제품이 아니라, 외국 선수, 그것도 1년 내내 현지에서 뛰는 선수가 아닌, 대회 때만 얼굴을 잠깐 내미는 그런 선수의 이름을 따서 ‘아이디어 상품’을 만들었고, 불티가 나게 팔려졌다는 사실이다.
박주봉선수 부친과의 인터뷰
후추 명예의 전당의 하이라이트로 자리 잡고 있는 ‘후추 노컷 인터뷰’. 추석을 맞아 고국에 잠시 귀국한 후에, 말레이시아로 갈 줄 알았던 후추 편집진의 ‘통밥’에도 불구하고, 지난 9월 27일 영국에서 말레이시아로 바로 직행한 박주봉을 직접 만나기는 어려웠다. 광고 수입 한푼 없는 후추 운영진이, 창간호에 실린 ‘황선홍 선수 현지 인터뷰’다 뭐다 해서, 이젠 ‘개털’이 난 이유도 있었겠지만, 막중한 책임을 어깨에 지고 말레이시아에 입성한 박주봉 코치가, 현지에서 ‘자리를 잡을 겨를’도 주지 않고 마감이 임박한 인터뷰 하겠다고 들이닥치는 것 자체가 박주봉에 대한‘오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없이, ‘차선책’이라고 생각했던 박주봉의 부친, 박명수 선생을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 전라북도 전주로 차를 몰았다. 전화 상으로도 워낙 깍듯하셨고, 따뜻하게 맞아 주신 박 선생님을 만나자마자, ‘정말로 오길 잘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추에서 준비해 간 간단한 질문들만 여쭤보고 바로 상경할 계획이었지만, 박선생님의 워낙 친절하고 구체적인 답변 덕분에 3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부분은, 박명수 선생의 기억력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 할 정도로 치밀했고, 선명하셨다. 다음은 10월1일 ‘국군의 날’에,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막둥이 박주봉’, ‘배드민턴 영웅 박주봉’이다.
주방장:선생님,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너무 감사 드립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하구요.
부친:아닙니다. 이렇게 먼 길까지 오시느라 수고들 하셨습니다.
주방장:어쩜 그렇게 정정 하십니까, 선생님? 실례지만,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부친:하하~ 저요… 만으로 예순 일곱입니다.
주방장:오랫동안 어린 아이들과 생활하셔서 그런지 너무나 건강해 보이시고 좋습니다.
부친:97년에 정년하고, 요즘은 뭐 그리 고독하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전주 시립 노인 복지 회관에서 바둑도 두고, 사교 댄스도 운동 삼아 배우고 있고, 산행도 다니고 합니다.
주방장:다행이십니다. 건강하셔야죠.
부친:박주봉 선수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까? (본가에서도 아직 말레이시아 도착 여부 확인이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부친: 예, 아직 연락이 없네요. 오늘 아침엔 배드민턴 협회에 전화를 해서, 말레이시아 협회쪽에 연락을 좀 취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어쩌면 오늘 내일 중으로 (연락이) 올 것 같기도 합니다만…
주방장:네. 아마 워낙 경황이 없어서 연락을 못하는 것이겠죠.
박주봉 선수의 현역 시절 성적이나 업적에 대해선 저희가 다 자료를 조사해서 알 만큼 알고 있고, 박주봉 선수 사생활(?)에 대해서 좀 들으려고 왔습니다.
부친:사생활이요? 하하.. 우리 주봉이 만큼 사생활 깨끗한 애가 있습니까?
주방장:박주봉 선수가 막내지요? 평상시 성격은 어떻습니까?
부친;네, 4남 2녀 중에 막둥이입니다. 갸는 거시기(박명수선생께서 간혹 쓰시는 은은하고 정감 가는 전라도 사투리. 주방장은 이런 맛깔스런 전라도 사투리를 이전까지 들어 본적이 없었다. 이하 인터뷰는 이런 맛깔스런 사투리들을 그대로 싣습니다), 성격이 워낙 꼼꼼하고 세심하고 정결하지요. 우리 마누라는 나를 닮았다고 하지만, 나보다 더 하지요. 해외에서 워낙 훈련이다 경기다, 뛰다 보니까,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익숙햐져서 그란지, 외국에 한번씩 대회 갔다 오면, 그 거시기… 일본 요넥스 사에서 시합 때 입으라고 주는 경기복을, 딱 한번 입고 깨깟이 세탁하고 다림질 해서, 포개 포개 접어서, 가방에 한 가방씩 넣어 와요. 그걸, 즈그 형이다 매형이다, 학교 후배들이다 한테 일일이 다 나눠주고,… 지금 그 김동문이, 하태권이 같은 전주농고 후배들은 고등학교 때, 전부 우리 주봉이가 갔다 준 ‘오리지날 일제’ 티샤쓰 입고 뛰고 그랬지요. 어릴 때부터 절대 자기 책임은 꼭 끝까지 다 하는 성격이었어요. 공부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보기 하고는 달리, 어려서부터 누구한테 지는 거 싫어
했고요.
주방장:‘배드민턴 선수 박주봉’이 아닌, ‘막둥이 아들 박주봉’으로서 아버님이 가장 기특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뭔가요?
부친:글쎄… 아무래도 우리 주봉이가 형제들간한테 잘 하는 것, 그거지요. 어디 가서 우승하고 메달 따고 하는 것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실 주봉이가 우리같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을 정말 많이 도와 주기도 했어요. 자기 형이 미국에서 박사학위 공부할 때에도, 우리 주봉이가 많이 도와줬고… 또 한가지는, 갸가 그렇게 어린 나이부터 외국에 혼자 나가고 했지만, 남자로서 ‘유혹에 잘 이긴다’는 점. 참 고맙고 기특합니다.
주방장:‘유혹에 잘 이기다' 니요? 아~ 그 일부 외국 여자 선수들이 ‘공개 구혼’ 하고 그랬던 얘기 말씀이신가요?
부친:응, 그라지, 그라지… 그 일본에 ‘진나이 지미코’ 라는 선수는 정말 대단했어요. 우리 주봉이한테 편지 보내려고 한국말을 직접 배웠을 정도고, 편지도 굉장히 많이 써 보내고 했어요. 근데, 주봉이 갸가 정말 고마운 것은, 절대로 ‘친구 이상’으로 선을 넘지 않았다는 것이지. 내가 일본에 경기하러 갔을 때 같이 따라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 지미코 그 선수가 있더라고. 내가 이렇게 보니까, ‘야들은 절대로 나쁜 짓 할 사이는 아니구나’ 해서, 주봉이한테 커피 대접도 하라고 하고, 내가 그렇게 시켰어요. 갸는 정말 주봉일 좋아했어, 친구로. 정말 좋은 친구로. 걔 말고도, 그 말레이시아의 여기자, 저기 있는 저 사진도 그 친구가 보내준 것이고... (박주봉이 용수철처럼 뛰어 올라 스매싱을 하고 있는 대형 칼라 사진을 가리키며) 그 친구도 아주 대단했지요. 그리고 중국의 그 황아 선수도 그랬고. 하지만, 내가 그것만은 분명하게 가르쳤지요. “니가 결혼은 한국 여성과 해야, 평생 마음 고생 안하고 산다.” 라고요. 주봉이는, 절대로 부모님 말씀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는 부분에 대해선 두번 다시 의심을 안하는 성격이었죠, 어려서부터.
주방장:결혼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끝나고 이수진씨랑 하셨죠?
부친:그라지, 우리 수진이랑 했고, 지금은 손주 광열이도 있고. 수진이가 지금 2번째 아이를 가졌어요. 그래서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에서 혹시라도 음식이 잘 안 맞을까 봐 걱정이지. (막내 며느리를 얘기하는 모습이 마치 친막내딸 얘기하시듯, 다정하게 느껴졌다)
주방장:부인한테는 박주봉 선수가 잘 하나요?
부친:그럼, 갸는 부인한테는 특별히 잘해요. 혼자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해서 그런지, 부인 가사 일을 돕는다는 것이 당연히 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전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고. 아내가 섭섭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참 열심히 도와주는 모습이야.
주방장:박 코치 어머님은 혹시라도 그런 모습 보시고 ‘질투’ 안 하시나요? ^^
부친:아녀, 그런 것 없어. 우리는 워낙 자식들이 많다 보니까, 갸들 그렇게 사는 것 보면 그저 이쁘고 좋고 그라지.
주방장:(요 대목에서 아니나 다를까, 말레이시아에 있는 박주봉 선수로부터 집에 전화가 온다. "야 정말 후추 취재 타이밍 예술이다" 하고, 반갑게 막내 아들과 통화 하시며‘며느리걱정’‘손주 걱정’, ‘공부걱정’...등을 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뭔가 찌링 찌링 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운동 선수 부모님들이 참 지극한 정성으로 뒷바라지 하시는데, 아버님도 예외는 아니셨겠지요?
부친:허허… 나야 뭐. 내가 워낙 오랫동안 교직 생활을 했고, 참 우리 주봉이는 그런 쪽으론 운도 좋았어요. 학교측으로부터 배려도 많이 받았고… 내가 한 뒷바라지라곤, 그저 운동도 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시킨 것밖에 없지요. 전주농고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한국체대 갈 때는 정말 온 식구들이 크게 한번 홍역을 앓았죠. 그게 다 ‘지방 정서’가 그렇거든요. 내가 당시에 전북 도내 체육 담당 장학사로 있었는데, 아들내미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시키려고 한다고 욕도 많이 먹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때 한체대를 포기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 한체대에서는 운동 선수들이 수업을 받아야 했거든요. 운동은 평생 할 수 없는 것이고, 나는 주봉이가 꼭 배워야 할 공부는 배워야 한다는 주의였으니까. 당시 전북 배드민턴 명문이었던 원광대에 안 보낸다고, 그때 교육감한테 가서 ‘한소리’도 들었고, 원광대 총장님이 그때 ‘전북 애향 운동 본부장’도 하셨는데.. 허허.. 좀 난처하긴 했죠. 하지만, 난 한체대에서 주봉이한테 했던 한마디를 믿고 그리로 보냈습니다. 주봉이의 ‘장래를 책임져 주겠다’는 얘기 말이죠. 그리곤, 은퇴 후, 교수도 시켜주고 했으니까 잘 된 결과지요.
주방장:그러셨군요. 20년 전부터 그런 훌륭한 생각을 하셨다는 사실이 참 대단하십니다. 남들처럼, ‘뱀탕’, ‘개고기’ 뭐 이런 것들은 안 먹이셨나요? ^^;
부친:허허, 우리 주봉인 어려서부터 키만 삐죽하게 컸지, 너무 말라서, 항상 걱정이었죠. ‘언제 저눔 저 배드민턴 팬츠에 허벅지가 꽉 찰 정도로 다리에 근육이 붙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정도로 다리가 가늘고 약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주봉이가 잘 알아서 경기할 때, 보완을 해 나가더라구요. 남들보다 ‘덜 뛰고, 네트 플레이 효과적으로 하고’ 하면서요. 국내 대회는 빠지지 않고, 지 애미랑 전국을 다니며 따라가서 봤죠. 하지만, 해외 경기는 일본밖에 못 가봤어요. 이번에 이제 말레이시아는 내년쯤에 한번 가 보고 싶어요.
주방장:그렇게 약해 보여도, 박주봉 선수 ‘큰 부상’ 당했다는 얘기는 잘 못 들었는데…?
부친:다른 종목 선수들에 비하면, 큰 부상은 많이 없었어요. 나랑 같이 일본 갔을 때, 허벅지 부상을 당해서 아주 혼이 난 적이 있죠. 말은 안 통하지, 우리 협회 관계자고 뭐고… 평소에 그렇게 우승을 많이 시켜준 주봉이가 다쳤는데도, 일본 가서 딱 애가 쓰러지니까, 전부 ‘아버님이 알아서 하라’ 식이더라구요. 그래서, 그때 제가 느낀 바가 크죠. 그리곤 주봉이한테 일렀어요. "아무리 니가 운동을 잘하고 해도, 니몸은 니가 챙겨야지, 아무도 니몸 걱정 안 해준다. 도저히 못 뛸 정도로 아프면, 그 경기 포기하고라도 몸을 아껴야 한다. ” 라고요. 우승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몸 망가지면, 선수 생활 끝 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아킬레스 건도 한번 다치고, 중국 가서 식중독 한번 걸리고.. 뭐 대충 그 정도죠.
주방장:외국에서는 박주봉 선수의 인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얘기는 말로만 들었습니다. 실제 어느 정도 인지요?
부친:조금 아까 통화 하면서도 그러는데, 그 쪽은 지금 난리가 났나 봐요. 공항에서부터 벌써 취재진이 몇십명이 따라 붙고, 어디 공식 만찬에 초대되고… 그 전에도 사실 말레이시아에서 우리 주봉인 ‘영웅 대접’을 받았어요. 그 쪽에 있는 어느 한국 교포가 주봉이한테 하는 소리가, “ 내년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여당이 표를 얻으려면, 박주봉이를 감독으로 앉혀야 하는 입장일 테니까, 계약 조건이나 뭐나 당신 마음대로 불러도 다 들어 줄 것이요” 라고 그랬다네요. 그 만큼 그 나라 국민들은 주봉이에 대한 기억이나 애정이 열광적이에요. 원래 주봉인 말레이시아에도, 그 쪽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화교’들한테 인기가 더 많았어요. 말레이시아 국민들에겐 7-80년대 그들의 배드민턴 우상 ‘시덱 형제’가 건재 했으니까요. 하지만, 주봉이가 그 전설적이라는 ‘시덱 형제’들과 경기를 하기만 하면, 정말 너무나도 멋진 ‘명승부’를 펼치면서 그들을 꺾고 하니까, 언제부터인가, 말레이시아 국민들까지도 다 주봉이를 열렬히 성원해주더라 더군요. ‘적’ 이지만, 흠 잡을 데가 없으니까 그랬겠죠. 주방장:정말 대단하네요. 그런 위대한 아드님을 두신 부모로서, 요즘 TV에서 나오는 ‘박찬호 선수나 고종수 선수’ 같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우리 국민들의 열광적 관심을 보시노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부친;우리 주봉이가 할 때는, 사실 시대가 달랐으니까. 그런 스타들이 없었어. 그리고 ‘비인기 종목’이었기 때문에, 그런 관심 없는 것에 대해서 지금이랑 비교하고 싶지도 않고 그랬어요. 야는 한가지, 적어도 배드민턴 계에 있어서는 ‘세게적인 스타’로 자리를 굳혔기 때문에, 사실 그런 선수들 봐도, 하나도 부럽지는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나는 우리 박주봉이가 더 자랑스럽고, 애국자 노릇을 했다고 봐요.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몰라줘도, 하나도 상관 없어요.
주방장:네.옳으신 말씀입니다.아드님 배드민턴 시키신 것에 대한 후회는 없으십니까?
부친:없어요, 정말이지, 단 한번도 후회 한 적이 없어요. 본인도 후회하지 않고.
주방장:자, 그럼 이런 ‘효자 노릇’을 하는 배드민턴 같은 종목을, 우리 팬들이나 집행부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애정을 갖고 활성화 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 없으십니까? 이대로 그냥 방치해 두어도 되는 것입니까?
부친:허허… 지금 이 ‘비인기 종목’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이 그냥 이러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제가 생각하기엔 앞으로 ‘5년 이내’에.. 바로 나타날 거에요. 지금 김동문이, 하태권이 ‘후진’이 없어요. 고등학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학교 1-2학년생들이 김동문이, 하태권이를 바짝 따라 붙어 줘야 앞으로 발전이 있는데, 지금 전혀 없어요. 또, 권승택 국가대표 감독이 걱정을 많이 해요. 어찌 보면, 우리 주봉이는 시대도 잘 타고 났어. 정치적으로는 어쩐지 몰라도, 국가적으로도 스포츠에 대한 투자가 엄청나던 80년대에 뛰었거든. 그때는 주봉이가 결승에만 올라가도, 중앙신문 전부에 나오곤 했어. 그러한 시대가 참 좋았지요. 요즘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주방장:그럼 5년 후에는, 우리 나라 배드민턴의 미래가 아주 어두워지겠네요.
부친:그게.. ‘천재성’ 가지고 있는 아이들 얘기도 했지만, 배드민턴 같이 개인 기술을 요하는 종목은 국민학교, 늦어도 중학교에는 많은 어린 선수들을 육성 시켜야 되는데, 그게 없는 게 내가 제일 걱정이야. 지난 여름, 미얀마에서 열린 주니어 대회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지. 전통적으로 주니어 대회는 한국이 최강이었어. 왜냐? 다른 나라 어린 선수들은 수업 받을 거 다 받아가며 운동 했지만, 우리 어린 선수들은 운동만 했으니까, 기량 차이가 나타나지. `고등학교 대 대학’ 선수들이 뛰는 경기 같았으니까. 근데 이번에 주니어 대회 가서는, 아주 ‘참패’를 당하고 왔다더군. 그게 중학교, 고등학교부터 ‘체계적인 지도’도 부족하고, 선수들도 프로야구나 프로축구로 가야지, 배드민턴 왜 하냐?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거 아니겠냐고? 물론 협회에서도 충분한 지원이나 ‘동기 부여’를 못 해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책임의 전부일 순 없고… 지금 국가대표 선수들이 은퇴하면 뭐 하고 삽니까? 아주 극소수만이, 실업 팀들, 저기 거시기… 삼성전기(남), 그리고 대교(여) 같은 몇 안 되는 실업 팀에 뽑혀가고, 나머지 선수들은 무슨 ‘구청 소속’으로 뛰는데… 거기는 정식 직원으로 뛰는 것이 아니라, ‘임시직’, 소위 ‘일당’을 받고 뛰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나중에 ‘경력 증명서’도 못 떼어 준다고 합디다. 그건 우리 주봉이도 잠깐 경험 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구청, 도청 소속으로 뛴 선수들은 ‘경력’으로도 인정을 받지 못 하니까, 나중에 무슨 ‘호봉 책정’에도 도움이 안 되고, 선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무슨 일을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니, 배드민턴을 해서 장래가 보여? 아님 뭐시… 되는 게 없으니까…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지. 그나마 한 두개 있는 실업 팀들 마저, 국민들의 성원이 없으면 스폰서 안 할 것이고… 그래서 국민적인 관심이 밑바탕이 되어 줘야 해요. 협회측에서도 걱정을 많이 합디다. '현 시점에서 주봉이 같은 선수가 국내에 돌아와서, 후배들 양성을 해주는 것이 절실하다. 네트 플레이나 두뇌 플레이 같은 부분들이 현재 지도자들 중에선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라고 하지만... 나도 역시 동감을 해요. 하지만, 주봉이는 이제 나름대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려고 거기 가있는 것이니까, 내가 보기엔 앞으로 한 4년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주방장: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젠 선수들도 자기 갈 길을 찾아야죠. 아버님 말씀을 이렇게 듣다 보니, 참 박주봉 선수만한 ‘효자’가 없다고 생각 되어서, 자식 된 입장에서 저 역시 송구스러워 지는데요. 정말 그 동안 ‘아들 박주봉’이 부모님께 전해 드린 그 ‘기쁨’이란 것은 어느 정도일 지 상상이 안 갑니다.
부친:우리가 6남매를 키우고 공부 시키면서, 참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했지만, 주봉이를 보면, 갸는 정말 언제든지 ‘기쁨’만 안겨줬어요. 정말로 ‘기쁨’만. 우리 마누라는 그런 말을 해요. “주봉이 덕분에 내 가슴 속엔 정말 요만큼의 슬픔도 뭐도 없다.’고 말이죠. 세상 살고 싶진 않은 때가 있어도, 주봉이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또 떨려져요. 평생 너무나 ‘기쁨’만 안겨 준 자식이지…
주방장:제가 이 수많은 스크랩 북(대략 12권쯤?)을 보면서, 이 수 많은 기사들을 정리하시면서, 부모님들이 매번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부모님들은 정말 오래 오래 건강하게, 장수하실 것 같습니다.
부친:허허허… 고맙습니다.
주방장:오랫동안 너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저희가 꼭 기사를 출력해서 댁으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들은 대로, 본 대로... 정말 열심히 박주봉 선수에 대한 기사를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친:예, 감사합니다. 먼 길까지 찾아와 주셔서..
이렇게 해서, 박주봉의 부친이자 ‘한국 배드민턴의 산 증인’ 박명수 선생과의 인터
뷰는 마쳤다. 뭐랄까…? 박 선생님을 만나는 동안, 참으로 ‘곧고, 순수하시고, 건강
하신 분’이란 인상을 받았다. 적당히 ‘시골 할아부지’ 냄새도 풍기시되, 인터뷰
내내 예의를 지키시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시던 박명수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
사의 뜻을 전한다. 참으로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훌륭한 인간 박주봉’이란
느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 3시간 가량의 대화였다.
'후추 노컷 인터뷰 II - 김문수 현 국가대표 코치'
박주봉을 취재하면서, 10년 이상 그와 함께 코트를 누볐던 그의 '분신' 김문수씨를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후추 편집진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던 중에, 원고 마감 시간을 불과 7시간 남기고 그와의 전화 인터뷰가 성사 되었다. 취재 기간 내내 김코치가 말레이시아 전지 훈련을 가 있던 상태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결국 통화라도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와 통화를 한 시각은 10월 5일 오후 4시 반. 삼성전기 배드민턴 팀 코치 직도 겸하고 있는 터라, 수원에 있는 회사 체육관에서 훈련 중인 그를 바꿔 달라고 했다. 박주봉-김문수 조를 보고 '영-호남의 조화'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했지만, 김코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털털한 경상도 사내' 라는 느낌을 쉽게 받았다.
후추:안녕하세요?시간을 이렇게 내어 주셔서 감사 드리고요.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김문수:네. 곧 전국체전이 있어서 소속팀으로 복귀하고, 요즘 한창 훈련 중입니다. 태릉에서 계속 있다가 말레이시아 전지 훈련도 갔다 왔고, 요즘 좀 바쁩니다..
후:그러시군요. 어쩐지 지난 주에 계속 전화를 드려도 핸드폰도 안되고, 체육관에도 안 계시고. 해외에 나가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말레이시아 갔다 오셨군요? 혹시 거기서 박주봉 선수 만날 시간이 있으셨습니까?
김:아니요. 못 만났습니다.저희가 말레이시아 바로 떠난 후에 아마 도착 했을 겁니다.
후:저희의 취재 목적은, "우리도 이제 '비 인기 종목'에 신경 좀 쓰자" 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이렇게 김코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요즘 우리 배드민턴 어떻습니까?
김:뭐, 요즘도 좋죠. 남자 복식 같은 경우는 아직도 세계 톱 랭커들이고요. 하지만 외국에 비해서 우리가 지금 유망주들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김동문-하태권' 이후에 활약할 만한 재목들이 많이 없죠. 우리는 사실 '클럽 시스템'이 아닌 '엘리트 체제'에서 하기 때문에, 선수가 많이 부족하죠. 그렇게 얇고 부족한 선수층에서 이정도만 해 주는 것도 선수들이 정말 잘 해 준다고 봐야 되고요. 중국 같은 나라는 '대표급' 선수만 우리보다 한 10배는 많아요. 그런데도 우리 선수들이 그들와 세계적인 무대에서 견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선수들 참 대단한 것입니다.
후:그렇네요. 배드민턴이 김코치님 현역 시절보다 솔직히 많이 가라 앉아 있는 상황인데, 그 이유는 뭘까요?
김:아무래도... 우리는 '홍보 부족'이 제일 큰 이유 같습니다. 배드민턴을 '보는 사람', '알아 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우리도 신이 나서 할텐데... 협회, 언론이나, 동호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야 할 때이죠. 배드민턴은 동호인들은 참 많은데, 경기장에 나와서 구경 해 주는 사람들은 없어요. 시합장에 나가보면 정말 썰렁해요. 사람이 뭐 거의 없으니까. 그런데서 운동하려고 하면... 참
후:우리 국민들, 올림픽 같은데 나가면 항상 배드민턴은 자동적으로 '금메달' 기대하면서, 평상시에는 생전 구경 한번 안 나가보는 게 왠지 잘못 되게 아닌가 싶어서요.
김:뭐 사실, '비 인기 종목' 이라는 것도 알고, 축구나 야구 보면서 사람들이 그러는 것을 인정은 합니다. 우리도 좋아하는 종목이니까요. 그렇지만, 가끔 시합장에 나가서 썰렁한 모습보고 그러면 좀 그렇죠.
후:앞으로 5년 후에 정말 '배드민턴 강국'으로 떠 오를 나라는 어디일까요?
김:지금 우리가 볼 때, 중국, 인도네시아, 덴마크, 한국, 말레이시아.. 정도를 최강국으로 보고 있는데. 앞으로는, 중국, 인도네시아, 덴마크 이 3개국이 아마 주도를 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도 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동남아, 특히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는 남자쪽에 특히 투자를 많이 하고, 육성을 많이 하고 있고요.
후:김코치님이 현역 시절 때, 워낙 많은 대회를 우승 하셨으니까 여쭤 보는데요. 그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시합은 어느 시합이었나요?
김:저 같은 경우에는... 85년 캘거리에서 주봉이 하고 나갔던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하고 아마 제일 좋았을 거예요. 그때가 우리 배드민턴 협회 사상 첫 세계 대회 우승이라서, 제일 기억에 남지요. 그 다음엔 뭐 애틀란타, 아니 바르셀로나 올림픽도 기억에 남고요.
후:박주봉 선수랑 처음 호흡을 맞춰서 출전한 국제대회는 83년 말레이시아 월드컵이
었죠? 그때는요?
김:아이고, 많이 아시네요. 그 대회는... 첫 금메달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세계 선수권 대회보단 비중이 떨어지는 대회였고요.
후:박주봉 선수. 파트너로서 평가 하신다면?
김:주봉이는... 워낙 꼼꼼하고 차분하고, 생활이건 운동이건 빈틈이 없으니까. 저 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제가 많이 모자라지요. ^^
후:아휴, 그래도 김 코치님 같은 분이 음지에서 많이 도와 주셨으니까, 그 '환상의커플'이 가능 했겠죠. 박주봉 선수랑은 요즘도 '형. 아우' 하면서 지내시죠? 가끔 만나세요?
김:(아이고.. 고맙습니다) 예. 그럼요. 한번씩 한국 나오면 만나고, 술도 한잔씩 하고 그럽니다.
후:네. 바쁘신데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여쭙고 끝내죠. 우리 배드민턴이 예전의 그 '박주봉-김문수' 시대를 재현하려면 뭐가 제일 필요할까요?
김:사실 협회에서도 '꿈나무 육성'도 꾸준히 하고 있고, 장학금도 지원하고 있고... 실업 팀에서도 저희 같은 경우엔, '지방 순회 투어'도 만들어서 지방 팬들을 좀 끌어 모으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지방에서 시합을 하면, 뭐 관중 동원도 좀 하고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그렇게라도 하니까, 조금은 관중들이 늘어나요. 또, '배드민턴 팬클럽'도 바로 며칠 전에 발족해서, 우리 여기 체육관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동호인들이랑 선수들이랑 같이 어울 리는 시간도 갖고 있고요. 근데, '홍보'가 많이 안되고, 팬들이 성원을 해 주지 않는다면, 배드민턴 선수들이나 코치들이나 오래갈 수 없죠.
후:그게 바로 저희가 할 일이군요. 알겠습니다. 오늘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 내 주셔
서 감사합니다.
김:아닙니다. 앞으로도 좋은 일 많이 해 주십시오.
마감박두 극적연결!! 박주봉 전화 인터뷰
'명예의 전당' 마감 시간 1시간 전에 '극적으로' 박주봉 선수랑 통화가 가능했다. 말레이시아 현지 시간, 10시. 아직 영국에서 짐이 도착하지 않아서 '보따리' 생활을 하고 있다는 박주봉과 그의 아내 이수진씨, 그리고 아들 광열 등 3식구는, 호텔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취사가 가능한 콘도로 옮겼다고 한다. 다음은 약 30여분간 통화한 박주봉과의 노컷 인터뷰 내용이다.
후추: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전화 드립니다. 이렇게 불쑥 전화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쉬시지도 못 하게.
박주봉;아닙니다. 근데, 조금만 일찍 전화했더라면, 못 받을 뻔 했네요. 저희도 지금 막 들어왔거든요.
후:네, 사실은 조금 전에도 한번 했는데, 아무도 전화를 안 받더라구요. 요즘 그쪽 생활은 어떠세요?
박:아무래도 좀 불편하지요. 짐도 지금 오는 중이고 해서... 앞으로 한 2주는 확실히 더 이 생활을 해야돼요.
후:그쪽 현지인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대단하죠?
박:네... 뭐, 그렇죠. 1주일 전에 도착해서, 지난 금요일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쪽의 관심은 대단해요. 첫날 연습 후에도 말레이시아 신문들 1면에 전부 기사가 나고, 공항에도 기자들이 많이 나오고...
후:지난 주에 아버님 찾아 뵈었을 때, 워낙 상세한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몇 가지만 여쭤보고 끊겠습니다. 현역 시절 워낙 우승을 많이하셔서 저희도 취재 과정에서 통산 우승 횟수 집계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거든요. 정확히 몇 회지요?
박:아버님이 말씀 안하시던가요? 다 알고 계실텐데. 공식적으로 71회입니다.
후:그럼 그 수많은 대회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합은 어떤 경기였나요?
박:아무래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딸 때랑, 85년 캘거리 세계 선수권 대회가 가장 감격스러웠죠. 그 전에 무슨 OPEN 대회는 우승을 했어도, 세계 선수권 대회는 그때가 사상 첫 금메달이었거든요. 세계 선수권은 2년마다 한번씩 밖에 안 열리는 대회고 하니까. 정말 감격 스러웠죠. 올림픽 때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후에, 처음으로 딴 금메달이니까.하나를 뽑기는 어렵지만,그 두 대회가 가장 감격스럽더라구요.
후:네,그러셨군요.박주봉 선수의 이름이 '기네스 북'에 올랐다는 말은 정확히 뭐죠?
박:그게... 기네스 북에... 스포츠 란에 종목 별로 최다 우승자가 쫘악 나오거든요. 거기에 제가 아마 '세계 선수권 대회 최다 우승자'로 나왔을 거에요. 통산 제가 7번 우승 했는데, 아마 5번째에 이미 이름은 올라갔다고 하더라구요.
후:대단하십니다. 7번씩이나. 그리고 참, 박주봉 선수가 '배드민턴 서적'에도 나온다
는 말은요?
박:아, 그거는요. 우리나라는 배드민턴 잡지나 뭐 이런 게 많이 없지만, 영국이나 일본에는 워낙 많으니까... 그런 잡지랑 배드민턴 서적에 제 사진하고, 왜 제가 '네트 플레이' 하고 있는 사진을 담아 놓고, 이게 바로 '박주봉식 네트 플레이다.' 라고 부연 설명 해놓고 그런거죠.
후:좋습니다. 박주봉 선수는 워낙 많??
‘서윤희’라고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99년 7월 12일, 미얀마 양곤. 한국 주니어 대표팀 ‘준준결승’ 안착. 그러나…
지난 1년간 언론에 소개되었던, 몇 가지 ‘배드민턴’ 관련 기사 헤드라인들이다. 우리나라 배드민턴의 현실이다. ‘리아모’. 그는 중국 국가대표팀 단식 전문 코치였지만, 현재는 우리나라에서 우리 대표팀 단식 전담 코치로 월 3천불씩 지급을 받고 있다. 그렇다. 우리 배드민턴이 현재 중국인 코치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
‘서윤희’. 무슨, 미스코리아 출신 여자 연예인? 아니다. 서윤희는 올해 중학교 3학년의 ‘배드민턴 천재’이다. 소위 ‘스포츠 광’이라는 후추 독자들에게마저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 이게 바로 우리 나라 스포츠팬들이 배드민턴에 보이는 통상적인 ‘관심’이다.
지난 7월. 99년 아시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리나라 주니어 대표팀은 단 한 명도 결승에 진출한 선수가 없었다. 꼭 ‘결승’, 또는 ‘금메달’에 목숨 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 나라 청소년 대표 축구팀이, 세계대회도 아닌, 아시아권 대회에서 줄줄이 ‘준결승행 좌절’이란 기사가 나왔더라면, 아마도 축협 전화통엔 또 불이 났을 것이다. 그렇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서 ‘축구의 금메달’보다 더 확실한 ‘금메달 후보’로 인정 받고 있는, 대한민국 배드민턴 ‘미래’의 현주소이다.
우리나라 배드민턴계에 평상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항상 ‘용서’가 되어왔다. 왜? ‘비인기 종목’ 이니까. 그 한마디로 매사가 해결되어왔다. ‘비인기 종목’… “야, 축구 대표팀 승패나, 이승엽이 홈런 신기록 달성 여부도 제때 알기 바쁜데, 배드민턴까지 내 무슨 수로 알겄냐?” 이를 보고 아무도 욕하는 사람 없다. 후추 역시, 지금 당장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런 팬들의 평소 ‘불감증’이 ‘죄악’으로 변하는 시점은 바로 올림픽 때이다. 내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배드민턴 선수들이 만에 하나라도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다면, 그때는 ‘누구 모가지’가 날라갈 지 아무도 모른다. 언론에선 또 무슨 ‘막판 승부욕 부족’, ‘꿈나무 육성 계획 결여’, ‘진부한 훈련 방식’…등등의 더러운 꼬투리를 잡아가며 ‘분위기 조성’을 할 것이고, 4년 내내 코방귀 한번 안 뀌던 일부 팬들은, 그것에 또 동요되어서 ‘우리 나라 배드민턴은 박주봉이 이후로 끝났어…’ 하며 등을 돌릴 것이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스폰서들은, 팬들이 관심 없는 스포츠에 대한 투자에 또 한번 궁색해 질 것이고-… 바로 이것이 4년마다 계속되는 우리나라 아마츄어, 아니 ‘비인기 종목'의 애환’이다.
요 대목에서 후추가 내린 결론은, ‘우리나라 배드민턴 선수들은 잘 하는 정도를 뛰어 넘어, 완전히 미쳤다’ 이다. 그만큼 ‘약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 배드민턴 선수들이다.
후추 명예의 전당 제3호 헌액자로 박주봉 선수, 현 말레이시아 배드민턴 대표팀 코치를 선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후추의 아주 작은 목소리로나마,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 대한 팬들의 관심도를 배가시키고 싶어서이다. 왜?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4년마다, ‘파렴치한’ 인간들이 되기 때문이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 항상 언론이나 일부 팬들은 ‘효자 종목’으로 배드민턴을 꼽기 마련이다. 그런 ‘효자 짓’하는 자식들에게, 우리만큼 ‘애정 없는 부모’도 드물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관심을 보이란 말이냐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후추 역시 인정한다. ‘시청률 타령’만 하는 우리나라 방송사에서 그런 ‘비인기 종목’ 경기가 언제 어디서 열리는 지, 상냥하게 알려줄 리 없으니까. 그럼 뭐냐? 최소한, ‘은메달’이라도 따고 돌아오는 그 선수들에게 돌을 던지지는 말자는 얘기다. 일부 축구 팬들은 올림픽, 월드컵 같은 ‘빅 이벤트’가 2개씩이나 있는 축구를 위해 투자하는 돈은 아직까지도 부족하다고 한다. 물론 다른 축구 강국들의 투자 수준을 볼 때,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소위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노숙까지 해 가며 축구경기 티켓을 사려고 기다리는 축구 팬들을 바라 보면서 가장 간절하게 부러워 하는 것은, 아마도 ‘돈 투자’가 아니라, 그런 팬들의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팬들이 바라보는 ‘비인기 종목’의 시각과 관심이 바뀌어야 한다. 아니, 이제는 그런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좀 ‘못’ 해도, 우리 팬들은 할 말이 없게 되었다. 황선애, 박주봉, 김문수, 유상희, 김연자, 정명희, 정소영, 방수현, 김동문, 나경민… 등과 같은 수 많은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팬들에게 기쁨과 ‘금 덩어리’를 가득 안겨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팬들의 애정은, 집 나간 ‘바둑이’를 우연히 만났을 때 정도의 그것 밖에 안되니 말이다.
‘세계의 황제, 한국의 머슴 - 박주봉’
어떤 스포츠 팬에게 ‘박주봉’ 하면, “누구? 쿠웨이트 박?” 하고 반문을 할 정도로, 박주봉의 존재는 우리 머리 속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진 않다. 지난 십 수년간 그의 이름 옆에 항상 따라 다니던 수식어, ‘배드민턴의 교과서’, ‘셔틀콕의 제왕’, ‘복식황제’… 등등을 들어 오면서, 필자 역시 아주 막연하게, ‘정말 배드민턴 잘 하는 선수’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점을 고백한다. 하지만, 후추 명예의 전당 후보자로 그의 업적, 기록, 그리고 성장과정…등을 면밀히 조사 하면서, 박주봉의 ‘위대함(Greatness)’에 대한 새로운 ‘경이’를 갖게 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배드민턴 강국들인 동남아나 유럽에선 그의 지명도가 도무지 어느 정도이길래, 해외에서 그렇게까지 ‘박주봉~ 박주봉~’하고 난리를 떠는지?... 알아야만 했다. 아주 간단 명료, 그리고 시원 삼빡하게 말하자면… 세계가 바라보는 ‘배드민턴의 박주봉’은, 우리 국민들이 ‘축구의 펠레’, 또는 ‘육상의 칼 루이스’ 쯤을 바라보는 시각과도 같다고 생각하면 정확할 것이다. 올림픽 말고는 제대로 배드민턴 중계조차 안 해주는 국내 방송의 현실 때문에, 테니스나 골프와 같이 배드민턴에도 ‘그랜드 슬램’이 있다는 사실조차 우리는 모르고 산다. 동남아 국가들처럼 자기나라 선수들에게 ‘일방적이고 열광적인’ 지지 (지난 방콕 아시안 게임 때, 다들 이미 목격했겠지만)를 보내는 사람들 역시, 박주봉의 ‘마술’ 앞에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세계 최강대국 미국조차 은근히 깔보는, ‘자존심의 지존’ 유럽인들도 박주봉의 ‘세기’에 혀를 내둘렀다. 반면, 우리나라 피가 펄펄 끓고 있는 박주봉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시각은, 국제대회 나가서 종종 메달 따오는, 그저 그렇고 그런 ‘비인기 종목 선수들 중에 하나’쯤이 아닌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의 이런 ‘무지함’ 때문에, ‘살아있는 전설? 박주봉’은 지금 이 시각 말레이시아의 한 체육관에서 그의 ‘후계자 양성’이 아닌, ‘엄한’ 말레이시아 선수들을 열심히 조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잘 하는 소리로, ‘그저 곁에 있어만 줘도 고맙다.’라고 한다. 우리가 영원히 사랑하고 아껴줘야 할만큼, ‘Korea’를 빛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들려 줬던 선수들. 우리나라가 배출 해낸 ‘세계적인 스타’들이 왜 하나 둘씩 바다를 건너 쓸쓸한 이국 땅에서만 기억되고, 존경받고, ‘재활’되어야만 하는지… 우리나라 축구 팀이 ‘베켄바워’를 감독으로 영입하게 되는 영광 정도의 ‘특혜’를, 현재 말레이시아 배드민턴 대표팀은 박주봉을 통해서 누리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배드민턴 팀은 현역시절 ‘박주봉의 밥’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중국 '애'들한테서 지도받고 있는 판국에 말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비 인기 종목’ 선수들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관심이 점점 식어갈 때, 박주봉이 보여줬던 ‘신기’는 우리의 몫이 아닌, ‘그들의 몫’이 되어 버릴 것이고, 나아가서는 ‘효자이기는 하지만 인기 없는 종목’ 그 자체도 우리 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국내 팬들이 ‘박주봉의 전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꼭 팬들의 잘못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젠 진정으로 그의 ‘위대함’을 누군가는 밝게 비춰줘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한국인 박주봉’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 석자를 ‘후추 명예의 전당’에 영원히 헌액시킨다.
‘배드민턴 신동 박주봉’
언젠가 ‘세계 테니스계의 큰별’ 존 맥캔로의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난다. 자기 키보다도 더 커 보이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비교적 정확하게 공을 맞추는 그의 어린 모습을 담은 흑백 릴(reel) 테이프 였다. 필자는, 박주봉의 ‘어린 시절’을 취재하면서 언젠가 보았던 그 ‘흑백 화면’을 자꾸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타이거 우즈, 마라도나, 그리고 캔 그리피 주니어...와 같이, 어렸을 적부터 소위 ‘천재성’을 타고 난 외국의 대 스타들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부러워’ 한 적이 있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런 믿기 어려운 ‘천재성’을 지닌...박주봉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주봉의 배드민턴 ‘입문’은, 앞서 언급한 그런 ‘세계적인 스타’들의 그것처럼, ‘천리안’을 가지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박주봉의 부친 박명수(67) 선생은, 말 그대로 평생을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숨쉬며 살아 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6척 거구’ (186 cm) 라는 표현이 전혀 손색없을 만큼, 워낙 탁월한 신체 조건을 타고 나셨고, 고등학교 시절 연식정구 선수로 뛰었던, 정말로 경험이 풍부하셨던 ‘스포츠맨’ 아버지를 둔 이점을 톡톡히 본 셈이다. 4남2녀 중 ‘막내둥이’로 태어난 박주봉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승부욕’을 과시했다. 동네 꼬마들과 한번 맞붙은 ‘구슬치기’나 ‘딱지치기’에선 왠만하면 져본 일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항상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들을 상대했고, 무슨 일이든 ‘지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다.
교직생활을 하시던 아버님의 점심 도시락을 배달(?)하기 위해, 여섯살 난 박주봉은 매일같이 전주 풍남 국민학교에 등교를 했다. 점심시간 중에, 어린 학생들과 배드민턴을 치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는 배드민턴의 '첫경험'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지도하시던 풍남 국민학교 배드민턴부 선수들과 함께 어울려서 라켓을 처음 잡아본 그는. 그로부터 일체 다른 놀이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죽어라고, 정말로 죽어라고 배드민턴 라켓만 손에 쥐고 놓질 않았다. 너무나도 어린 주봉이었지만, 셔틀콕을 맞히는 재주가 남달랐고, 국민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는, 방과 후에도 얼른 숙제를 끝내고 곧바로 라켓을 휘두르는데 열중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풍남국교 배드민턴부 정식 선수로 선발되고, 곧 이어 5학년 때, 처음 출전했던 제2회 소년체전(부산)에서 당당히 ‘단체전 우승’이라는 놀라운 스타트를 끊는다. 하지만, 이듬해 배드민턴을 비롯한 일부 종목들이 소년체전에서 사라지게 되고, 한참 배드민턴에 빠져 있었고,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소년 박주봉에게 일대 ‘고민’이 시작된다. 풍남학교 배드민턴부는 해체되지만, 이때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체육에 대한 비전’과 ‘아들의 실력에 대한 신뢰’ 덕분에, 그는 ‘개인 훈련’을 하며 6학년 시절을 보낸다. 당시, 실내 강당이 없어서 풍남학교 강당에서 연습하던 전주농고 선수들의 ‘잔심부름’을 해가며 말이다.
그리고 곧 그는, 서울에서 열렸던 종별 선수권 대회에 홀로 출전, 또 한번의 우승을 따 낸다. 전주 서중학교 시절 박주봉은, 1학년 때부터 중3 선배들과 연습을 하고 시합을 했을 정도로 기량이 돋보였고, 출전했던 대회란 대회는 모조리 휩쓸었다. 한마디로 ‘스타의 탄생’이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한 박주봉을 스카우트해 가려는 고등학교는 여럿 있었지만, 당시 전북의 배드민턴 명문 전주농고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박주봉은 고교 진학을 앞두고 또 한번 거취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여기서 박주봉의 부친, 박명수 선생의 믿기지 않는 ‘통찰력’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0년 전에 이미 그는, ‘대한민국 학원 스포츠의 병마’에 대해서 정확히 예지하고, ‘공부를 뒷전으로 하는 운동’에 대해선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셨다. 중학교 시절에도 전주 서중 교장선생의 배려로, ‘국, 영, 수’만은 수업시간을 조정하면서까지 듣게 하였고, 방과 후 저녁시간에는 ‘특별과외’를 받아 가면서 학교 공부를 소홀하지 않게 하였다. 당신이 한 평생 교직 생활을 하셨기 때문인지, ‘운동은 평생 할 수 없는 것’이란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 아무리 독보적인 ‘배드민턴 신동’ 박주봉이었지만, 비교적 운동 선수들의 학업 참여를 ‘가볍게’ 배려(?) 하던 전주농고에 입학하는 것을 너무나 속상해 하시던 박명수 선생이었다. 당시, 이런 박주봉을 위해서 명문 전주고에 배드민턴부를 창단한다는 계획까지 있었지만, 없던 일로 돌아갔고 결국엔 전주농고에 입학하게 된다. 모름지기,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 부모님의 학업에 대한 열성이, ‘자식 스타 만들기’의 그것에 반만 되더라도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은퇴 선수들의 ‘무기력함’은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관점에서 박명수 선생은, 운동선수 부모로서의 훌륭한 벤치마크(benchmark) 대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배드민턴의 쿠데타 (Coup d’Etat)
박주봉이 전주농고에 입학하자마자, 대한민국 배드민턴 역사의 한 페이지는 새롭게 장식되고 만다. 1980년 대구에서 개최되었던 전국 종별 선수권 대회 준준결승. 광주일고 3학년 배드민턴부 주장이자, 당시 고교 랭킹 2위였던 안상우 선수를 맞아, ‘까까머리 고1’ 박주봉은 체력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적게 뛰는’ 시합을 주도. 2:0 이라는 완승을 거두게 된다. 코치, 부모님들 마저 ‘안상우한테는 힘들다.’ 라고 포기했던 경기였지만, 박주봉은 위기 때마다 고1답지 않은 테크닉과 승부 근성을 선보이며, ‘골리앗 안상우’를 격파한다. ‘완벽한 두뇌 플레이의 개가’라고 당시 배드민턴 인들은 평가 했고. 이후, 준결승에서 맞붙은 고교랭킹 3위 서성민, 그리고 결승에서의 김창국 등의 ‘선배’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고등학교 진학 후, 첫 전국대회 우승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또한, 이 대회에서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곧바로 박주봉의 가슴엔 ‘태극마크’가 달려진다.
처음으로 국가대표 선수가 된 박주봉의 첫 국제무대는 이웃나라 일본에서 열렸던 ‘한-일 고교 선발 교환 경기’ 였다. 5명씩 출전하는 단체전에 출전한 박주봉이 ‘한국 고교 랭킹 1위’를 달고 나왔고, 대회 규정 상, ‘랭킹 1위 대 랭킹 1위’가 맞붙어야 하는 상황에서, 당시 일본측 배드민턴 관계자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무리 친선 경기지만, 너무나 ‘승리’에만 집착한 한국 선수단은 고등학교 1학년짜리 풋내기 선수를 랭킹 1위로 속여서 일본 랭킹 1위와 대결 시켜 그 경기는 포기하게 하고, 나머지 4경기를 독식하려고 한다’는 비난이었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애들의 이런 성급한 ‘호들갑’은 풋내기 박주봉의 ‘신들린 플레이’로 말끔히 사라지게 된다. 일본 랭킹 1위 선수와 붙어서 깨끗한 승리로 장식을 했으니 말이다. 당시, 우리보다 한수 위에 있었던 일본 배드민턴계는, 박주봉 덕분에 아주, 제대로 ‘쑈크’를 먹게 되고, ‘세끼네’라고 하는 일본 배드민턴 협회 관계자는 어린 박주봉의 현란한 ‘두뇌 플레이’를 보면서, “저런 어린 선수가 저 정도의 두뇌 플레이를 구사한다면, 앞으로 일본 배드민턴은, 한동안 한국을 꺾기 힘들 것이다”라고 예언한 바 있다.
1980년 일본에서의 ‘박주봉 신드롬’은, 그 후 10년 아니 15년 가까이 계속 되어온 박주봉의 ‘세계적인 명성의 서곡’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은 그 후로, 한국과는 배드민턴에서 ‘쨉이 안될 정도’로 급락하게 되지만, 그들의 지속적이고 한결 같은 배드민턴에 대한 사랑과 ‘영웅에 대한 예우’는 우리 한국인들의 낯을 뜨겁게 한다. 자국 선수도 아닌 한국 선수 박주봉의 엄청난 플레이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당시일본의 ‘배드민턴’ (‘배도민톤’) 잡지사는, 2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박주봉의 친가에 매월 잡지를 무료 우송해 주고 있다. 어림잡아 240권의 잡지를, 한 달도 빼놓지 않고 매월 박주봉의 전주 본가로 우송해 주고 있다는 얘기다. 누가 부탁을 하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박주봉… 그 후로 그가 보여 준 ‘우승 행진’은, 그 전까지 우리가 보아온 수많은 스타들의 ‘승리’ 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Made in Korea’ 마크를 달고 뛴 그 어떤 선수의 커리어보다도 완전한 ‘독식’이었고, 동남아, 유럽에서 그의 인기는 국내팬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아주 간략하게나마 ‘박주봉의 전설’을 되돌아 본다.
"박주봉의 전설" - 화려한 경기기록
연도 대회명 성적 비고
1982 30회 덴마크 오픈 우승 복식경기‘처녀출전',한국 배드민턴사에 첫복식 우승!
1983 3회 말레이시아 월드컵 우승 김문수와 처음으로 복식 출전
세계 선수권 동메달세계 선수권 출전 사상 첫 메달 (당시 한체대 1년)
1984 32회 덴마크 오픈 우승
29회 스웨덴 오픈 우승
1985 일본 오픈 우승
75회 전영 오픈 우승 남자 복식의 교과서'란 별명 얻다!
6회 아시아 선수권 우승
4회 캘거리 세계 선수권 우승 남복,혼복 첫 2관왕(김문수,정명희와 한조 이뤄)
1986 86 아시안 게임 우승 3관왕!
1987 대만오픈 준우승첫 단식 출전. '허리부상'으로 분패. 6개월간요양
1988 88 올림픽 시범 경기 금메달 김연자와 한조
1989 말레이시아 오픈 우승 남.복/ 혼.복 싹쓸이 우승!
태국 오픈 우승
월드컵 선수권 우승
전영 오픈 우승
일본 오픈 우승
1990 일본 오픈 우승
전영 오픈 우승
90 북경 아시안 게임 금메달 2관왕
1991 일본오픈 우승
코리아 오픈 우승
21회 세계 선수권 우승
전영 오픈 우승 배드민턴의 '윔블던' 3연패 기록!
제29회 대한민국 체육상 수상 경기부분
기네스 북에 오름 세계대회 최다 우승자(남복 25회,혼복25회)
1992 코리아 오픈 2연패 우승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현역 은퇴후,결혼
1993 세계 혼합 단체전 우승 박주봉-김문수 일시 컴백
한체대 전임강사
1994 배드민턴 용구 'JB' 브랜드 제작 ㈜ 마스만 스포츠와 합작
1995 국제심판 박주봉으로 일시 복귀
배드민턴 특사' 브루나이 왕실 방문, '왕족 지도'
박주봉 컴백 애틀란타 올림픽 대비. 태릉 입촌
홍콩 오픈 우승 박주봉-심은정
중국 오픈 우승
태국오픈 우승 박주봉-나경민
1996 일본 오픈 우승
코리아 오픈 우승
스웨덴 오픈 우승 혼복 랭킹 5위로 올림픽 출전권 획득!
96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 세계랭킹 1위 김동문-길영아 조에 패배
영국 대표팀 코치로 5년 계약
1997 IBF 선정 '허버트 스칠상' 수상 역대 8번째
1999 말레이시아 코치로 임명 IBF 사상 가장 '파격적인 조건'
세계대회 총 70여 차례 우승이라는 통산 업적을 기록했다. 위의 표에서 명시된 대회에서 대부분 2관왕, 내지는 3관왕을 차지했다고 보면 대략 70여 차례의 기록이 나오게 된다.이래도 과연 그가 ‘축구의 펠레’, 그리고 ‘육상의 칼 루이스’에 버금가는 선수란 호칭이 부적합하단 말인가… '대한민국 땅, 전주의 아들 - 박주봉'이었다.
‘주봉버거’는 도대체 뭐냐고?
우리 후추 독자의 수준 정도라면, 아마도 ‘박주봉’ 하면 따라 다니는 ‘주봉 버거, 주봉 쥬스, 주봉 아이스크림’ 정도의 얘기를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소위, ‘전문 스포츠 신문’이라고 떠들어대는 국내 언론들이 박주봉의 ‘해외 명성’을 약간이나마 소개하려고 뿌린 말들이다.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후추 독자들은 궁금하다. ‘주봉버거~ 주봉버거~’ 하는데, 도대체 ‘주봉버거’가 말레이시아의 ‘맥도날드나 롯데리아쯤에서 출시된 ‘준 브랜드’쯤 되는 지, 아니면 무슨 ‘박주봉 골수팬’ 한명이 즐겨먹는 ‘홈메이드 햄버거’ 수준을 말하는 것인지. 그 이상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주봉버거’의 올바른 정의를 내리기 전에, 지난 2년간 박주봉이 거주했던 ‘배드민턴 종주국(?) 영국’, 그리고 말레이시아. 이 두 나라에서의 박주봉을 들여다 본다.
영국에서 열리는 ‘전영 오픈’은 ‘배드민턴의 윔블던’ 만큼 권위 있고 역사가 깊은 대회이다. 그리고, 실제 ‘전영 오픈’은 윔블던의 실내 배드민턴 코트에서 개최된다는 사실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자, 한번 상상해 보자. 우리가 매년 TV에서 지켜보는 윔블던 테니스 대회. 그런 국제적인 ‘그랜드 슬램’ 이벤트에서, 듣도 보도 못한 20대 초반의 한국인 선수가 우승을 했다고 생각해 보시라. 우리 나라 국민들을 비롯한, 전 세계의 테니스 인들은 방방 뜨고 난리가 날 것이다. 1985년 ‘배드민턴의 윔블던’ 전영 오픈에 대한 세계 배드민턴 인구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한가지 다른 점이라곤, 정작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광분’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후로도 남자복식, 혼합복식 경기에서 수 차례 우승을 하고, 89-91년까지 ‘전영 오픈 3연패’라는 ‘무식한 기록’을 달성한 선수가 박주봉이다. 윔블던 테니스에서 엄청난 ‘우승 행진’을 기록한 스웨덴의 ‘뷔에른 보리’, 미국의 ‘피트 샘프라스’, 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같은 선수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들의 눈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경기를 수 년간 보여준 선수들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 표시’이기도 할 것이다. ‘자기네 집 앞마당에서’ 자국 선수는 물론, 덩치가 훨씬 큰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붙었다 하면 맥을 못 추게 만드는 한국의 박주봉 역시 영국인들의 뇌리에는 강하게 남아 있었다.
96년 10월 15일. 박주봉이 조국을 위해 서른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올림픽에 출전하고 난 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영국 배드민턴 협회에서 접촉이 온다. 배드민턴 종주국이란 수식어가 창피할 정도로 당시 영국 배드민턴 대표팀은 심각한 기량 저하를 경험하고 있었고, ‘세계 배드민턴 6강’의 척도였던 ‘A 블록(Block)’ 군에서 밀려나가 버린 것이다. ‘배드민턴의 교과서’라고 불리우던 박주봉을 긴급 수혈해서, 영국 대표팀의 기술 향상은 물론, ‘살아 있는 전설’에게서 직접 지도를 받는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 올린다는 계산으로 그를 영입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월봉 약 400만원, 그리고 차량 보조 정도의 그다지 빠방한 ‘금전적 조건’은 아니었지만, 박주봉을 영국으로 몰고 간 결정적인 이유는, 영국측이 제시했던 ‘학업 보조’ 내용이었다. 박주봉 부부 모두를 주 2회 랭귀지 스쿨에서 함께 영어를 배우게 했고, 그것도 혹시 부족할까봐 개인교습을 주 2회 지원했다. 영국같이 ‘짜기로’ 소문난 나라에서, 어마어마하게 비싼 ‘개인교습’을 지원해준 것을 보면, 계약 조건이 금전적으로도 그리 나쁘지 만은 않았을 뿐더러, 어릴 적부터 ‘교육열’이 남달랐던 박주봉을 ‘꼬시기엔’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 대표팀 전임 코치로 1년을 마칠 즈음, 박주봉의 영국 대표팀은 A Block권으로 재진입 하였고, 영국뿐만 아닌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도 틈만 나면 ‘러브콜’을 받았다. 휴가라도 받게 되는 날이면, 그는 덴마크, 스웨덴등으로 ‘우정출연식 강연’을 하기 일쑤였고, 잦은 해외 전훈등의 이유로 그가 처음에 계획했던 영국에서의 ‘박사과정’은 서서히 멀어져만 갔다.
올해 초, 말레이시아 배드민턴 협회로부터 대표팀 감독직 제안을 받고, 지난 7월 말레이시아행 결정을 영국 대표팀측에 통보한다. 이때 영국 배드민턴 협회측의 반응은, 그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배드민턴 영웅 박주봉’에 대한 애정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당신이 말레이시아에서 그런 파격적인 조건으로 지도자 생활과 공부를 겸할 수 있다면, 우리쪽에선 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는 유념하길 바란다. 그 쪽 동남아 국가들의 배드민턴에 대한 열정은 감히 상상을 초월한다. 혹시라도 성적이 부진하다면, 금새 비난의 대상으로 몰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절대 그렇게 되길 바라진 않지만, 만약에라도 말레이시아를 떠나고 싶어진다면, 언제든지 영국으로 돌아와 주길 바란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대표팀 지도자 자리를 만들겠다”하면서 떠나는 박주봉을 위해 성대한 ‘송별회’를 열어 주었다.
1983년, 김문수 선수와 처음으로 한조를 이뤄서 출전했던, 제3회 말레이시아 월드컵 대회에서 박주봉은 말레이시아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승부를 제공하고, 그 후부터 ‘말레이시아의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게 된다. 79년부터 ‘말레이시아의 박찬호’ 정도의 사랑을 받아 오던, 말레이시아 배드민턴계의 거목 ‘시덱 형제’를 격침시켰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 편이라도, 마치 ‘예수님’ 정도로 생각해 오던 ‘시덱 형제’를 상대로 너무나도 훌륭하고 깨끗한 플레이로 그들을 제압한 박주봉-김문수 조에게 결국엔 말레이시아 국민들도 두 손을 든 셈이었다.
축구, 그리고 배드민턴이 ‘국기’로 알려진 말레이시아는, 특히 배드민턴 경기가 있는 날이면 택시 기사에서부터 노점 상인들까지, 일제히 귀에다 라디오를 갖다 대고 ‘광적으로’ 자국 선수들을 응원한다. 국방부 차관이 현 배드민턴 집행부 회장직을 겸하고 있고, 말레이시아 배드민턴의 1등 후원자는 바로 말레이시아 수상의 부인이라는 말도 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름은 몰라도 박주봉의 이름 석자는 정확히 발음한다고 한다. 연봉 2억, 아파트, 차량 제공, 국립대학 스포츠 외교학/마케팅과 진학 보장… 등의 엄청난 조건을 받으며 말레이시아 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하기 위해, 박주봉이 지난 9월27일 말레이시아에 입성했을 때, 쿠알라룸푸르 공항에는 40여명의 취재진이 그의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였고, 곧바로 대사 초청 만찬 참여 등의 ‘국빈 대접’을 받고 있다. 현역 생활을 마감한 ‘한국의 감독’을 맞이하는 말레이시아 식 ‘영웅 대접’이다. 상상해 보시라. 정말 우리 같으면, ‘베켄바워’쯤이 우리 축구 대표팀을 지휘하기 위해 귀국했을 때나 있을 법한 얘기가 아닌지… 3년 전, 박주봉이 영국으로 떠날 때, 우리 언론사에선 아무도 공항에 나오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일시 귀국할 때 역시, 그는 텅 빈 김포 공항의 트랩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도 ‘세계의 황제, 한국의 머슴’이 과장된 표현이란 말인가…
약속한대로, ‘주봉버거’에 대한 진상을 밝히려 한다. 신문에서 간혹 소개되어 오던‘주봉버거’란? 상상 했던 것처럼, 무슨 햄버거 회사에서 박주봉과 계약해서 ‘준 브랜드’를 만든 것은 아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같은 ‘배드민턴 강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대회에 박주봉이 참가하는 1-2 주 동안, 주최측 체육관 내 상인들이 ‘주봉 버거’, ‘주봉 아이스크림’, ‘주봉 주스’ 라는 애칭(nickname) 을 달아서 판매를 했고, 그런 ‘깜짝 상품’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응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그 장사꾼들은 엄청난 ‘박주봉 특수’를 누린 셈이다. 이렇게 단발적인 상품이었지만 , 박주봉이 현역 시절 약 15년 동안, 동남아에서 경기에 출전하고 훈련했던 나날들을 계산해 보면, 어림잡아 1년에 2-3개월은 될 테니까, 그 매출 상승 효과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임은 분명하다. 쉽게 말해서 대충 이런 식이었다. “자~~ 주봉 버거 있어요ㅡ 주봉 버거… 박주봉이 펄펄 나는 이유… 바로 이 주봉 버거를 먹고 뛰기 때문입니다… 자~ 주봉 버거가 왔습니다.” 무슨 시장바닥 약장사 같은 분위기지만, 그래도 잘 팔린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우리도 올해, ‘이승엽 캐릭터 상품’ 판매로 대구 야구장 상인들이 톡톡히 재미를 봤다고 한다. 하지만 ‘주봉 버거’의 진짜 가치는, 자국 선수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제품이 아니라, 외국 선수, 그것도 1년 내내 현지에서 뛰는 선수가 아닌, 대회 때만 얼굴을 잠깐 내미는 그런 선수의 이름을 따서 ‘아이디어 상품’을 만들었고, 불티가 나게 팔려졌다는 사실이다.
박주봉선수 부친과의 인터뷰
후추 명예의 전당의 하이라이트로 자리 잡고 있는 ‘후추 노컷 인터뷰’. 추석을 맞아 고국에 잠시 귀국한 후에, 말레이시아로 갈 줄 알았던 후추 편집진의 ‘통밥’에도 불구하고, 지난 9월 27일 영국에서 말레이시아로 바로 직행한 박주봉을 직접 만나기는 어려웠다. 광고 수입 한푼 없는 후추 운영진이, 창간호에 실린 ‘황선홍 선수 현지 인터뷰’다 뭐다 해서, 이젠 ‘개털’이 난 이유도 있었겠지만, 막중한 책임을 어깨에 지고 말레이시아에 입성한 박주봉 코치가, 현지에서 ‘자리를 잡을 겨를’도 주지 않고 마감이 임박한 인터뷰 하겠다고 들이닥치는 것 자체가 박주봉에 대한‘오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없이, ‘차선책’이라고 생각했던 박주봉의 부친, 박명수 선생을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 전라북도 전주로 차를 몰았다. 전화 상으로도 워낙 깍듯하셨고, 따뜻하게 맞아 주신 박 선생님을 만나자마자, ‘정말로 오길 잘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추에서 준비해 간 간단한 질문들만 여쭤보고 바로 상경할 계획이었지만, 박선생님의 워낙 친절하고 구체적인 답변 덕분에 3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부분은, 박명수 선생의 기억력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 할 정도로 치밀했고, 선명하셨다. 다음은 10월1일 ‘국군의 날’에,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막둥이 박주봉’, ‘배드민턴 영웅 박주봉’이다.
주방장:선생님,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너무 감사 드립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하구요.
부친:아닙니다. 이렇게 먼 길까지 오시느라 수고들 하셨습니다.
주방장:어쩜 그렇게 정정 하십니까, 선생님? 실례지만,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부친:하하~ 저요… 만으로 예순 일곱입니다.
주방장:오랫동안 어린 아이들과 생활하셔서 그런지 너무나 건강해 보이시고 좋습니다.
부친:97년에 정년하고, 요즘은 뭐 그리 고독하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전주 시립 노인 복지 회관에서 바둑도 두고, 사교 댄스도 운동 삼아 배우고 있고, 산행도 다니고 합니다.
주방장:다행이십니다. 건강하셔야죠.
부친:박주봉 선수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까? (본가에서도 아직 말레이시아 도착 여부 확인이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부친: 예, 아직 연락이 없네요. 오늘 아침엔 배드민턴 협회에 전화를 해서, 말레이시아 협회쪽에 연락을 좀 취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어쩌면 오늘 내일 중으로 (연락이) 올 것 같기도 합니다만…
주방장:네. 아마 워낙 경황이 없어서 연락을 못하는 것이겠죠.
박주봉 선수의 현역 시절 성적이나 업적에 대해선 저희가 다 자료를 조사해서 알 만큼 알고 있고, 박주봉 선수 사생활(?)에 대해서 좀 들으려고 왔습니다.
부친:사생활이요? 하하.. 우리 주봉이 만큼 사생활 깨끗한 애가 있습니까?
주방장:박주봉 선수가 막내지요? 평상시 성격은 어떻습니까?
부친;네, 4남 2녀 중에 막둥이입니다. 갸는 거시기(박명수선생께서 간혹 쓰시는 은은하고 정감 가는 전라도 사투리. 주방장은 이런 맛깔스런 전라도 사투리를 이전까지 들어 본적이 없었다. 이하 인터뷰는 이런 맛깔스런 사투리들을 그대로 싣습니다), 성격이 워낙 꼼꼼하고 세심하고 정결하지요. 우리 마누라는 나를 닮았다고 하지만, 나보다 더 하지요. 해외에서 워낙 훈련이다 경기다, 뛰다 보니까,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익숙햐져서 그란지, 외국에 한번씩 대회 갔다 오면, 그 거시기… 일본 요넥스 사에서 시합 때 입으라고 주는 경기복을, 딱 한번 입고 깨깟이 세탁하고 다림질 해서, 포개 포개 접어서, 가방에 한 가방씩 넣어 와요. 그걸, 즈그 형이다 매형이다, 학교 후배들이다 한테 일일이 다 나눠주고,… 지금 그 김동문이, 하태권이 같은 전주농고 후배들은 고등학교 때, 전부 우리 주봉이가 갔다 준 ‘오리지날 일제’ 티샤쓰 입고 뛰고 그랬지요. 어릴 때부터 절대 자기 책임은 꼭 끝까지 다 하는 성격이었어요. 공부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보기 하고는 달리, 어려서부터 누구한테 지는 거 싫어
했고요.
주방장:‘배드민턴 선수 박주봉’이 아닌, ‘막둥이 아들 박주봉’으로서 아버님이 가장 기특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뭔가요?
부친:글쎄… 아무래도 우리 주봉이가 형제들간한테 잘 하는 것, 그거지요. 어디 가서 우승하고 메달 따고 하는 것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실 주봉이가 우리같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을 정말 많이 도와 주기도 했어요. 자기 형이 미국에서 박사학위 공부할 때에도, 우리 주봉이가 많이 도와줬고… 또 한가지는, 갸가 그렇게 어린 나이부터 외국에 혼자 나가고 했지만, 남자로서 ‘유혹에 잘 이긴다’는 점. 참 고맙고 기특합니다.
주방장:‘유혹에 잘 이기다' 니요? 아~ 그 일부 외국 여자 선수들이 ‘공개 구혼’ 하고 그랬던 얘기 말씀이신가요?
부친:응, 그라지, 그라지… 그 일본에 ‘진나이 지미코’ 라는 선수는 정말 대단했어요. 우리 주봉이한테 편지 보내려고 한국말을 직접 배웠을 정도고, 편지도 굉장히 많이 써 보내고 했어요. 근데, 주봉이 갸가 정말 고마운 것은, 절대로 ‘친구 이상’으로 선을 넘지 않았다는 것이지. 내가 일본에 경기하러 갔을 때 같이 따라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 지미코 그 선수가 있더라고. 내가 이렇게 보니까, ‘야들은 절대로 나쁜 짓 할 사이는 아니구나’ 해서, 주봉이한테 커피 대접도 하라고 하고, 내가 그렇게 시켰어요. 갸는 정말 주봉일 좋아했어, 친구로. 정말 좋은 친구로. 걔 말고도, 그 말레이시아의 여기자, 저기 있는 저 사진도 그 친구가 보내준 것이고... (박주봉이 용수철처럼 뛰어 올라 스매싱을 하고 있는 대형 칼라 사진을 가리키며) 그 친구도 아주 대단했지요. 그리고 중국의 그 황아 선수도 그랬고. 하지만, 내가 그것만은 분명하게 가르쳤지요. “니가 결혼은 한국 여성과 해야, 평생 마음 고생 안하고 산다.” 라고요. 주봉이는, 절대로 부모님 말씀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는 부분에 대해선 두번 다시 의심을 안하는 성격이었죠, 어려서부터.
주방장:결혼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끝나고 이수진씨랑 하셨죠?
부친:그라지, 우리 수진이랑 했고, 지금은 손주 광열이도 있고. 수진이가 지금 2번째 아이를 가졌어요. 그래서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에서 혹시라도 음식이 잘 안 맞을까 봐 걱정이지. (막내 며느리를 얘기하는 모습이 마치 친막내딸 얘기하시듯, 다정하게 느껴졌다)
주방장:부인한테는 박주봉 선수가 잘 하나요?
부친:그럼, 갸는 부인한테는 특별히 잘해요. 혼자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해서 그런지, 부인 가사 일을 돕는다는 것이 당연히 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전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고. 아내가 섭섭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참 열심히 도와주는 모습이야.
주방장:박 코치 어머님은 혹시라도 그런 모습 보시고 ‘질투’ 안 하시나요? ^^
부친:아녀, 그런 것 없어. 우리는 워낙 자식들이 많다 보니까, 갸들 그렇게 사는 것 보면 그저 이쁘고 좋고 그라지.
주방장:(요 대목에서 아니나 다를까, 말레이시아에 있는 박주봉 선수로부터 집에 전화가 온다. "야 정말 후추 취재 타이밍 예술이다" 하고, 반갑게 막내 아들과 통화 하시며‘며느리걱정’‘손주 걱정’, ‘공부걱정’...등을 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뭔가 찌링 찌링 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운동 선수 부모님들이 참 지극한 정성으로 뒷바라지 하시는데, 아버님도 예외는 아니셨겠지요?
부친:허허… 나야 뭐. 내가 워낙 오랫동안 교직 생활을 했고, 참 우리 주봉이는 그런 쪽으론 운도 좋았어요. 학교측으로부터 배려도 많이 받았고… 내가 한 뒷바라지라곤, 그저 운동도 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시킨 것밖에 없지요. 전주농고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한국체대 갈 때는 정말 온 식구들이 크게 한번 홍역을 앓았죠. 그게 다 ‘지방 정서’가 그렇거든요. 내가 당시에 전북 도내 체육 담당 장학사로 있었는데, 아들내미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시키려고 한다고 욕도 많이 먹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때 한체대를 포기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 한체대에서는 운동 선수들이 수업을 받아야 했거든요. 운동은 평생 할 수 없는 것이고, 나는 주봉이가 꼭 배워야 할 공부는 배워야 한다는 주의였으니까. 당시 전북 배드민턴 명문이었던 원광대에 안 보낸다고, 그때 교육감한테 가서 ‘한소리’도 들었고, 원광대 총장님이 그때 ‘전북 애향 운동 본부장’도 하셨는데.. 허허.. 좀 난처하긴 했죠. 하지만, 난 한체대에서 주봉이한테 했던 한마디를 믿고 그리로 보냈습니다. 주봉이의 ‘장래를 책임져 주겠다’는 얘기 말이죠. 그리곤, 은퇴 후, 교수도 시켜주고 했으니까 잘 된 결과지요.
주방장:그러셨군요. 20년 전부터 그런 훌륭한 생각을 하셨다는 사실이 참 대단하십니다. 남들처럼, ‘뱀탕’, ‘개고기’ 뭐 이런 것들은 안 먹이셨나요? ^^;
부친:허허, 우리 주봉인 어려서부터 키만 삐죽하게 컸지, 너무 말라서, 항상 걱정이었죠. ‘언제 저눔 저 배드민턴 팬츠에 허벅지가 꽉 찰 정도로 다리에 근육이 붙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정도로 다리가 가늘고 약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주봉이가 잘 알아서 경기할 때, 보완을 해 나가더라구요. 남들보다 ‘덜 뛰고, 네트 플레이 효과적으로 하고’ 하면서요. 국내 대회는 빠지지 않고, 지 애미랑 전국을 다니며 따라가서 봤죠. 하지만, 해외 경기는 일본밖에 못 가봤어요. 이번에 이제 말레이시아는 내년쯤에 한번 가 보고 싶어요.
주방장:그렇게 약해 보여도, 박주봉 선수 ‘큰 부상’ 당했다는 얘기는 잘 못 들었는데…?
부친:다른 종목 선수들에 비하면, 큰 부상은 많이 없었어요. 나랑 같이 일본 갔을 때, 허벅지 부상을 당해서 아주 혼이 난 적이 있죠. 말은 안 통하지, 우리 협회 관계자고 뭐고… 평소에 그렇게 우승을 많이 시켜준 주봉이가 다쳤는데도, 일본 가서 딱 애가 쓰러지니까, 전부 ‘아버님이 알아서 하라’ 식이더라구요. 그래서, 그때 제가 느낀 바가 크죠. 그리곤 주봉이한테 일렀어요. "아무리 니가 운동을 잘하고 해도, 니몸은 니가 챙겨야지, 아무도 니몸 걱정 안 해준다. 도저히 못 뛸 정도로 아프면, 그 경기 포기하고라도 몸을 아껴야 한다. ” 라고요. 우승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몸 망가지면, 선수 생활 끝 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아킬레스 건도 한번 다치고, 중국 가서 식중독 한번 걸리고.. 뭐 대충 그 정도죠.
주방장:외국에서는 박주봉 선수의 인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얘기는 말로만 들었습니다. 실제 어느 정도 인지요?
부친:조금 아까 통화 하면서도 그러는데, 그 쪽은 지금 난리가 났나 봐요. 공항에서부터 벌써 취재진이 몇십명이 따라 붙고, 어디 공식 만찬에 초대되고… 그 전에도 사실 말레이시아에서 우리 주봉인 ‘영웅 대접’을 받았어요. 그 쪽에 있는 어느 한국 교포가 주봉이한테 하는 소리가, “ 내년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여당이 표를 얻으려면, 박주봉이를 감독으로 앉혀야 하는 입장일 테니까, 계약 조건이나 뭐나 당신 마음대로 불러도 다 들어 줄 것이요” 라고 그랬다네요. 그 만큼 그 나라 국민들은 주봉이에 대한 기억이나 애정이 열광적이에요. 원래 주봉인 말레이시아에도, 그 쪽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화교’들한테 인기가 더 많았어요. 말레이시아 국민들에겐 7-80년대 그들의 배드민턴 우상 ‘시덱 형제’가 건재 했으니까요. 하지만, 주봉이가 그 전설적이라는 ‘시덱 형제’들과 경기를 하기만 하면, 정말 너무나도 멋진 ‘명승부’를 펼치면서 그들을 꺾고 하니까, 언제부터인가, 말레이시아 국민들까지도 다 주봉이를 열렬히 성원해주더라 더군요. ‘적’ 이지만, 흠 잡을 데가 없으니까 그랬겠죠. 주방장:정말 대단하네요. 그런 위대한 아드님을 두신 부모로서, 요즘 TV에서 나오는 ‘박찬호 선수나 고종수 선수’ 같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우리 국민들의 열광적 관심을 보시노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부친;우리 주봉이가 할 때는, 사실 시대가 달랐으니까. 그런 스타들이 없었어. 그리고 ‘비인기 종목’이었기 때문에, 그런 관심 없는 것에 대해서 지금이랑 비교하고 싶지도 않고 그랬어요. 야는 한가지, 적어도 배드민턴 계에 있어서는 ‘세게적인 스타’로 자리를 굳혔기 때문에, 사실 그런 선수들 봐도, 하나도 부럽지는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나는 우리 박주봉이가 더 자랑스럽고, 애국자 노릇을 했다고 봐요.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몰라줘도, 하나도 상관 없어요.
주방장:네.옳으신 말씀입니다.아드님 배드민턴 시키신 것에 대한 후회는 없으십니까?
부친:없어요, 정말이지, 단 한번도 후회 한 적이 없어요. 본인도 후회하지 않고.
주방장:자, 그럼 이런 ‘효자 노릇’을 하는 배드민턴 같은 종목을, 우리 팬들이나 집행부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애정을 갖고 활성화 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 없으십니까? 이대로 그냥 방치해 두어도 되는 것입니까?
부친:허허… 지금 이 ‘비인기 종목’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이 그냥 이러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제가 생각하기엔 앞으로 ‘5년 이내’에.. 바로 나타날 거에요. 지금 김동문이, 하태권이 ‘후진’이 없어요. 고등학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학교 1-2학년생들이 김동문이, 하태권이를 바짝 따라 붙어 줘야 앞으로 발전이 있는데, 지금 전혀 없어요. 또, 권승택 국가대표 감독이 걱정을 많이 해요. 어찌 보면, 우리 주봉이는 시대도 잘 타고 났어. 정치적으로는 어쩐지 몰라도, 국가적으로도 스포츠에 대한 투자가 엄청나던 80년대에 뛰었거든. 그때는 주봉이가 결승에만 올라가도, 중앙신문 전부에 나오곤 했어. 그러한 시대가 참 좋았지요. 요즘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주방장:그럼 5년 후에는, 우리 나라 배드민턴의 미래가 아주 어두워지겠네요.
부친:그게.. ‘천재성’ 가지고 있는 아이들 얘기도 했지만, 배드민턴 같이 개인 기술을 요하는 종목은 국민학교, 늦어도 중학교에는 많은 어린 선수들을 육성 시켜야 되는데, 그게 없는 게 내가 제일 걱정이야. 지난 여름, 미얀마에서 열린 주니어 대회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지. 전통적으로 주니어 대회는 한국이 최강이었어. 왜냐? 다른 나라 어린 선수들은 수업 받을 거 다 받아가며 운동 했지만, 우리 어린 선수들은 운동만 했으니까, 기량 차이가 나타나지. `고등학교 대 대학’ 선수들이 뛰는 경기 같았으니까. 근데 이번에 주니어 대회 가서는, 아주 ‘참패’를 당하고 왔다더군. 그게 중학교, 고등학교부터 ‘체계적인 지도’도 부족하고, 선수들도 프로야구나 프로축구로 가야지, 배드민턴 왜 하냐?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거 아니겠냐고? 물론 협회에서도 충분한 지원이나 ‘동기 부여’를 못 해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책임의 전부일 순 없고… 지금 국가대표 선수들이 은퇴하면 뭐 하고 삽니까? 아주 극소수만이, 실업 팀들, 저기 거시기… 삼성전기(남), 그리고 대교(여) 같은 몇 안 되는 실업 팀에 뽑혀가고, 나머지 선수들은 무슨 ‘구청 소속’으로 뛰는데… 거기는 정식 직원으로 뛰는 것이 아니라, ‘임시직’, 소위 ‘일당’을 받고 뛰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나중에 ‘경력 증명서’도 못 떼어 준다고 합디다. 그건 우리 주봉이도 잠깐 경험 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구청, 도청 소속으로 뛴 선수들은 ‘경력’으로도 인정을 받지 못 하니까, 나중에 무슨 ‘호봉 책정’에도 도움이 안 되고, 선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무슨 일을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니, 배드민턴을 해서 장래가 보여? 아님 뭐시… 되는 게 없으니까…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지. 그나마 한 두개 있는 실업 팀들 마저, 국민들의 성원이 없으면 스폰서 안 할 것이고… 그래서 국민적인 관심이 밑바탕이 되어 줘야 해요. 협회측에서도 걱정을 많이 합디다. '현 시점에서 주봉이 같은 선수가 국내에 돌아와서, 후배들 양성을 해주는 것이 절실하다. 네트 플레이나 두뇌 플레이 같은 부분들이 현재 지도자들 중에선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라고 하지만... 나도 역시 동감을 해요. 하지만, 주봉이는 이제 나름대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려고 거기 가있는 것이니까, 내가 보기엔 앞으로 한 4년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주방장: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젠 선수들도 자기 갈 길을 찾아야죠. 아버님 말씀을 이렇게 듣다 보니, 참 박주봉 선수만한 ‘효자’가 없다고 생각 되어서, 자식 된 입장에서 저 역시 송구스러워 지는데요. 정말 그 동안 ‘아들 박주봉’이 부모님께 전해 드린 그 ‘기쁨’이란 것은 어느 정도일 지 상상이 안 갑니다.
부친:우리가 6남매를 키우고 공부 시키면서, 참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했지만, 주봉이를 보면, 갸는 정말 언제든지 ‘기쁨’만 안겨줬어요. 정말로 ‘기쁨’만. 우리 마누라는 그런 말을 해요. “주봉이 덕분에 내 가슴 속엔 정말 요만큼의 슬픔도 뭐도 없다.’고 말이죠. 세상 살고 싶진 않은 때가 있어도, 주봉이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또 떨려져요. 평생 너무나 ‘기쁨’만 안겨 준 자식이지…
주방장:제가 이 수많은 스크랩 북(대략 12권쯤?)을 보면서, 이 수 많은 기사들을 정리하시면서, 부모님들이 매번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부모님들은 정말 오래 오래 건강하게, 장수하실 것 같습니다.
부친:허허허… 고맙습니다.
주방장:오랫동안 너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저희가 꼭 기사를 출력해서 댁으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들은 대로, 본 대로... 정말 열심히 박주봉 선수에 대한 기사를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친:예, 감사합니다. 먼 길까지 찾아와 주셔서..
이렇게 해서, 박주봉의 부친이자 ‘한국 배드민턴의 산 증인’ 박명수 선생과의 인터
뷰는 마쳤다. 뭐랄까…? 박 선생님을 만나는 동안, 참으로 ‘곧고, 순수하시고, 건강
하신 분’이란 인상을 받았다. 적당히 ‘시골 할아부지’ 냄새도 풍기시되, 인터뷰
내내 예의를 지키시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시던 박명수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
사의 뜻을 전한다. 참으로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훌륭한 인간 박주봉’이란
느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 3시간 가량의 대화였다.
'후추 노컷 인터뷰 II - 김문수 현 국가대표 코치'
박주봉을 취재하면서, 10년 이상 그와 함께 코트를 누볐던 그의 '분신' 김문수씨를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후추 편집진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던 중에, 원고 마감 시간을 불과 7시간 남기고 그와의 전화 인터뷰가 성사 되었다. 취재 기간 내내 김코치가 말레이시아 전지 훈련을 가 있던 상태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결국 통화라도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와 통화를 한 시각은 10월 5일 오후 4시 반. 삼성전기 배드민턴 팀 코치 직도 겸하고 있는 터라, 수원에 있는 회사 체육관에서 훈련 중인 그를 바꿔 달라고 했다. 박주봉-김문수 조를 보고 '영-호남의 조화'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했지만, 김코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털털한 경상도 사내' 라는 느낌을 쉽게 받았다.
후추:안녕하세요?시간을 이렇게 내어 주셔서 감사 드리고요.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김문수:네. 곧 전국체전이 있어서 소속팀으로 복귀하고, 요즘 한창 훈련 중입니다. 태릉에서 계속 있다가 말레이시아 전지 훈련도 갔다 왔고, 요즘 좀 바쁩니다..
후:그러시군요. 어쩐지 지난 주에 계속 전화를 드려도 핸드폰도 안되고, 체육관에도 안 계시고. 해외에 나가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말레이시아 갔다 오셨군요? 혹시 거기서 박주봉 선수 만날 시간이 있으셨습니까?
김:아니요. 못 만났습니다.저희가 말레이시아 바로 떠난 후에 아마 도착 했을 겁니다.
후:저희의 취재 목적은, "우리도 이제 '비 인기 종목'에 신경 좀 쓰자" 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이렇게 김코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요즘 우리 배드민턴 어떻습니까?
김:뭐, 요즘도 좋죠. 남자 복식 같은 경우는 아직도 세계 톱 랭커들이고요. 하지만 외국에 비해서 우리가 지금 유망주들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김동문-하태권' 이후에 활약할 만한 재목들이 많이 없죠. 우리는 사실 '클럽 시스템'이 아닌 '엘리트 체제'에서 하기 때문에, 선수가 많이 부족하죠. 그렇게 얇고 부족한 선수층에서 이정도만 해 주는 것도 선수들이 정말 잘 해 준다고 봐야 되고요. 중국 같은 나라는 '대표급' 선수만 우리보다 한 10배는 많아요. 그런데도 우리 선수들이 그들와 세계적인 무대에서 견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선수들 참 대단한 것입니다.
후:그렇네요. 배드민턴이 김코치님 현역 시절보다 솔직히 많이 가라 앉아 있는 상황인데, 그 이유는 뭘까요?
김:아무래도... 우리는 '홍보 부족'이 제일 큰 이유 같습니다. 배드민턴을 '보는 사람', '알아 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우리도 신이 나서 할텐데... 협회, 언론이나, 동호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야 할 때이죠. 배드민턴은 동호인들은 참 많은데, 경기장에 나와서 구경 해 주는 사람들은 없어요. 시합장에 나가보면 정말 썰렁해요. 사람이 뭐 거의 없으니까. 그런데서 운동하려고 하면... 참
후:우리 국민들, 올림픽 같은데 나가면 항상 배드민턴은 자동적으로 '금메달' 기대하면서, 평상시에는 생전 구경 한번 안 나가보는 게 왠지 잘못 되게 아닌가 싶어서요.
김:뭐 사실, '비 인기 종목' 이라는 것도 알고, 축구나 야구 보면서 사람들이 그러는 것을 인정은 합니다. 우리도 좋아하는 종목이니까요. 그렇지만, 가끔 시합장에 나가서 썰렁한 모습보고 그러면 좀 그렇죠.
후:앞으로 5년 후에 정말 '배드민턴 강국'으로 떠 오를 나라는 어디일까요?
김:지금 우리가 볼 때, 중국, 인도네시아, 덴마크, 한국, 말레이시아.. 정도를 최강국으로 보고 있는데. 앞으로는, 중국, 인도네시아, 덴마크 이 3개국이 아마 주도를 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도 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동남아, 특히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는 남자쪽에 특히 투자를 많이 하고, 육성을 많이 하고 있고요.
후:김코치님이 현역 시절 때, 워낙 많은 대회를 우승 하셨으니까 여쭤 보는데요. 그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시합은 어느 시합이었나요?
김:저 같은 경우에는... 85년 캘거리에서 주봉이 하고 나갔던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하고 아마 제일 좋았을 거예요. 그때가 우리 배드민턴 협회 사상 첫 세계 대회 우승이라서, 제일 기억에 남지요. 그 다음엔 뭐 애틀란타, 아니 바르셀로나 올림픽도 기억에 남고요.
후:박주봉 선수랑 처음 호흡을 맞춰서 출전한 국제대회는 83년 말레이시아 월드컵이
었죠? 그때는요?
김:아이고, 많이 아시네요. 그 대회는... 첫 금메달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세계 선수권 대회보단 비중이 떨어지는 대회였고요.
후:박주봉 선수. 파트너로서 평가 하신다면?
김:주봉이는... 워낙 꼼꼼하고 차분하고, 생활이건 운동이건 빈틈이 없으니까. 저 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제가 많이 모자라지요. ^^
후:아휴, 그래도 김 코치님 같은 분이 음지에서 많이 도와 주셨으니까, 그 '환상의커플'이 가능 했겠죠. 박주봉 선수랑은 요즘도 '형. 아우' 하면서 지내시죠? 가끔 만나세요?
김:(아이고.. 고맙습니다) 예. 그럼요. 한번씩 한국 나오면 만나고, 술도 한잔씩 하고 그럽니다.
후:네. 바쁘신데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여쭙고 끝내죠. 우리 배드민턴이 예전의 그 '박주봉-김문수' 시대를 재현하려면 뭐가 제일 필요할까요?
김:사실 협회에서도 '꿈나무 육성'도 꾸준히 하고 있고, 장학금도 지원하고 있고... 실업 팀에서도 저희 같은 경우엔, '지방 순회 투어'도 만들어서 지방 팬들을 좀 끌어 모으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지방에서 시합을 하면, 뭐 관중 동원도 좀 하고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그렇게라도 하니까, 조금은 관중들이 늘어나요. 또, '배드민턴 팬클럽'도 바로 며칠 전에 발족해서, 우리 여기 체육관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동호인들이랑 선수들이랑 같이 어울 리는 시간도 갖고 있고요. 근데, '홍보'가 많이 안되고, 팬들이 성원을 해 주지 않는다면, 배드민턴 선수들이나 코치들이나 오래갈 수 없죠.
후:그게 바로 저희가 할 일이군요. 알겠습니다. 오늘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 내 주셔
서 감사합니다.
김:아닙니다. 앞으로도 좋은 일 많이 해 주십시오.
마감박두 극적연결!! 박주봉 전화 인터뷰
'명예의 전당' 마감 시간 1시간 전에 '극적으로' 박주봉 선수랑 통화가 가능했다. 말레이시아 현지 시간, 10시. 아직 영국에서 짐이 도착하지 않아서 '보따리' 생활을 하고 있다는 박주봉과 그의 아내 이수진씨, 그리고 아들 광열 등 3식구는, 호텔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취사가 가능한 콘도로 옮겼다고 한다. 다음은 약 30여분간 통화한 박주봉과의 노컷 인터뷰 내용이다.
후추: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전화 드립니다. 이렇게 불쑥 전화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쉬시지도 못 하게.
박주봉;아닙니다. 근데, 조금만 일찍 전화했더라면, 못 받을 뻔 했네요. 저희도 지금 막 들어왔거든요.
후:네, 사실은 조금 전에도 한번 했는데, 아무도 전화를 안 받더라구요. 요즘 그쪽 생활은 어떠세요?
박:아무래도 좀 불편하지요. 짐도 지금 오는 중이고 해서... 앞으로 한 2주는 확실히 더 이 생활을 해야돼요.
후:그쪽 현지인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대단하죠?
박:네... 뭐, 그렇죠. 1주일 전에 도착해서, 지난 금요일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쪽의 관심은 대단해요. 첫날 연습 후에도 말레이시아 신문들 1면에 전부 기사가 나고, 공항에도 기자들이 많이 나오고...
후:지난 주에 아버님 찾아 뵈었을 때, 워낙 상세한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몇 가지만 여쭤보고 끊겠습니다. 현역 시절 워낙 우승을 많이하셔서 저희도 취재 과정에서 통산 우승 횟수 집계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거든요. 정확히 몇 회지요?
박:아버님이 말씀 안하시던가요? 다 알고 계실텐데. 공식적으로 71회입니다.
후:그럼 그 수많은 대회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합은 어떤 경기였나요?
박:아무래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딸 때랑, 85년 캘거리 세계 선수권 대회가 가장 감격스러웠죠. 그 전에 무슨 OPEN 대회는 우승을 했어도, 세계 선수권 대회는 그때가 사상 첫 금메달이었거든요. 세계 선수권은 2년마다 한번씩 밖에 안 열리는 대회고 하니까. 정말 감격 스러웠죠. 올림픽 때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후에, 처음으로 딴 금메달이니까.하나를 뽑기는 어렵지만,그 두 대회가 가장 감격스럽더라구요.
후:네,그러셨군요.박주봉 선수의 이름이 '기네스 북'에 올랐다는 말은 정확히 뭐죠?
박:그게... 기네스 북에... 스포츠 란에 종목 별로 최다 우승자가 쫘악 나오거든요. 거기에 제가 아마 '세계 선수권 대회 최다 우승자'로 나왔을 거에요. 통산 제가 7번 우승 했는데, 아마 5번째에 이미 이름은 올라갔다고 하더라구요.
후:대단하십니다. 7번씩이나. 그리고 참, 박주봉 선수가 '배드민턴 서적'에도 나온다
는 말은요?
박:아, 그거는요. 우리나라는 배드민턴 잡지나 뭐 이런 게 많이 없지만, 영국이나 일본에는 워낙 많으니까... 그런 잡지랑 배드민턴 서적에 제 사진하고, 왜 제가 '네트 플레이' 하고 있는 사진을 담아 놓고, 이게 바로 '박주봉식 네트 플레이다.' 라고 부연 설명 해놓고 그런거죠.
후:좋습니다. 박주봉 선수는 워낙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