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배드민턴 인생(4)

박주봉 0 1845

영광의 1986년이 지나고 1987년이 밝아온 1월초 대만오픈에 협회에서는 단식 출전을 결정했다. 86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당시 세계랭킹 1위였던 쟈오지아와를 내가 2대0 스트레이트로 이긴것을 보고 단식 세계제패의 욕심을 낸 것이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허리부상으로 준우승에 머무른데다가 곧이어 일본에서의 일본오픈 출전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러가지 검사를 했으나 운동을 쉬는길 밖에 없다는 의사들의 공통된 진단이었다. 약 5개월간 심한 운동을 중지하고 기본훈련만을 하던 1987년의 전반기는 참으로 암울했었다. 

사실 부상을 입은 뒤 선수는 자기몸은 자기 스스로 관리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서울로 대구로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갑갑한 것은 부모와 본인 뿐이었다. 

결국 1987년 후반기에 다시 복식으로 돌아왔고 허리도 점차 정상화되어 88년 서울올림픽 전시종목에 혼복을 정명희 선수와 출전, 우승하게 되었다. 
1989년 북경 세계선수권대회와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은 나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주었으며 성적은 아시안게임 혼복 우승에 그쳐야 했다. 

이때부터 현역 은퇴를 부모님께서는 신중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1991년 세계선수권대회가 덴마크에서 열리게 된데다가 1월에는 제1회 코리아오픈이 서울에서 열리게 되고 1992년 올림픽에서는 정식종목으로 배드민턴이 채택되어 은퇴문제는 신중히 고려되었으나, 결국 주위의 권고와 국가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결심으로 은퇴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로 미루게 된 것이다. 

1991년 일본오픈 남복,혼복 우승에 이어 처음 열린 코리아오픈에서 역시 남복(김문수), 혼복(정명희)에서 우승하여 장내를 메운 5000여 관중의 환호에 답하였다. 

이어서 5월 세계선수권대회는 나와 인연이 깊은 덴마크에서 개인전과 혼합 단체전이 열리게 되었다. 나는 단체전에서 남복과 혼복에서 승리하여 세계대회 단체전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역시 남자복식(김문수)과 혼합복식(정명희)도 우승하여 세계선수권대회 3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1990년말에는 세계 기네스북에 세계선수권 복식부문 최다우승으로 기재되었고 당분간은 나의 복식부문 5회 우승의 기록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해 선수로써는 가장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체육상을 받았다. 

1964년 12월 5일생인 나는 세계선수권 우승의 해인 1991년이 우리나이로 28세여서 체력의 한계를 차츰 느끼며 과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까지 체력이 유지될 수 있을런지 스스로 의문이 생기고 있을때 1991년 말에 심한 식중독 현상과 함께 빈혈증세까지 나타나 사실상 훈련중단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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