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배드민턴 인생(5)

박주봉 0 1782
92년 일본오픈에 참가신청만 해놓고 출전을 못했으며 곧이어 열린 제2회 코리아오픈도 신체 상태로는 출전할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고국 팬들에의 보답과 우리나라 배드민턴 붐 조성을 위해 결국 출전하여 스매싱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는 못했으나 수비위주의 게임을 펼쳐 간신히 우승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올림픽 출전 랭킹은 여전히 1위였고 병원에는 보름에 1번씩 검사를 받으며 약을 복용하고 치료를 계속 하였더니 점차 회복세를 보였다. 
3월의 전영오픈을 비롯한 유럽 써키트는 대회의 비중상 출전하는게 당연하였으나 치료의 계속과 훈련부족으로 참가를 포기했더니 3월말 올림픽 랭킹이 2위로 쳐지고 말았다. 

토너먼트 경기에서 1번시드는 2번시드에 비해 월등한 프리미엄이 있는 것이어서 다소 실망했으나 올림픽 우승을 목표로 한다면 최대 라이벌인 중국의 리용보/티앙빙리조와 말레이시아의 시텍형례조 인도네시아의 하루토노조, 뎀나크의 룬드조 그리구 중국의 B조인 첸강조를 모두 이겨야 하기때문에 외국 원정을 일체 중지하고 본격적인 체력훈련과 기술훈련을 병해하면서 올림픽에 대비하였다. 

나와 김문수선수의 기량은 사실 세계적인 수준으로 자부하고 있었으나 문제는 몹시 덥다는 현지에서의 체력이 감내할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였다. 
몸에 잘 듣는 보약도 도핑관계로 함부로 복용못하고(결국 1주일간의 검사끝에 출국진전에 일부 복용은 했지만) 진해에서 태릉으로 옮겨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훈련을 계속했다. 

체육관 온도(실내)가 보통 26~27도 였는데 여기에 냉방이 아닌 히터를 틀어 실내온도를 32~33도로 조정하여 7월중에 훈련을 하였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세계 정상 특히 올림픽 정상에의 길은 험난하기만 하고 피를 말리는 강훈련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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