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중의 전설 2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미국이란 나라에서 조금만
더 배드민턴이 활성 되었더라면… 아마도 박주봉은 '호나우도' 부럽지 않은 세계적인
스타로 대접을 받았을텐데… '제 2의 박주봉'은 지금도 어느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셔틀콕을 튕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제2의 박주봉'을 영원히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주방장 명전 Memory 2000. 8. 31
박주봉... 그의 명전 기사를 쓰면서 처음으로 '부담'이란 걸 느끼기 시작했다. 황
선홍에 이어 박찬희란 복서까지 명전에 올리면서 사방에서 기대 이상의 반응이 왔기
때문이다. 후추 편집진 앞으로 쏟아지는 격려, 감동, 감사의 이메일은 기쁨보다는
오히려 '더 잘 해야한다' 란 중압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박주봉이란 배드민턴 스
타에 대해서 글을 쓴다는 일이 여러가지 차원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나 역시
도 배드민턴이란 종목에 대한 사전 지식이 풍부하지 못했고 박주봉이 현역시절 뛰었
던 모습이 가물가물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박주봉이 국내에 없다는 사실이 가장
힘 들었다. 박주봉과의 전화 인터뷰라도 시도했건만 영국에서 말레이시아로 넘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하루 일과가 상당히 불규칙적이었고 숙소에서 그를 잡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박주봉의 명전을 회상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인물이 바로 그의 부친 박명수 선생
이다. 막내 아들을 대신해 인터뷰에 응해준 박 선생은 친절하셨고 자상하셨고 기억
력이 좋으셨다. 듣도 보도 못한 일개 스포츠 웹진의 인터뷰에도 그 정도의 성의를
보여주신 박선생을 보면서 다시 한번 '비인기 종목 선수들의 설움' 같은 걸 느끼기도
했다. 명전을 쓰다보면 항상 feel을 받는 시점이 있기 마련이다. 평균 20-30장 정
도의 원고 분량을 작성하면서 머리를 쥐어 뜯고 싶을 때도 있고 며칠동안 손을 놓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그 인물에 대한 확실한 feel을 받고 그 후부터
는 일사천리로 글이 써지는 경우가 많다. 박주봉의 경우, 그의 부친을 만나고 나오
면서 아파트 주차장 앞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1시간 정도의 인터뷰를 기대하고
갔건만 3시간을 넘길 정도로 박선생은 하실 말씀이 많으셨다. 그 사실 하나로도 글
을 쓰기에 충분한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박주봉의 명전 기사가 올라간 후, 며칠이 지나서 우리 후추의 스탭 한명이 나에게 말
했다. "참, 어제 박주봉 선수 아버님께서 사무실로 전화 하셨었어요. 저희가 우송
해 드린 기사 잘 읽으셨다고... 그리고 너무 너무 감사하다고... 그렇게 당신 아들에
대해서 고맙게 글을 써 주신 사람은 없었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후추 창간 후 처음으로 시도했던 비인기 종목 스타들의 명예 회복이었던 박주봉 선수...
이런 전화 때문에도 후추는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게 등을 돌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