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증후군
명절 증후군
자신을 알고, 자신의 뿌리를 알고, 그 근본을 찾아 꼭 돌아온다는 귀소본능.
인간이 원초적으로 지니고 사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 아닐까 한다.
해 마다 명절이 오면 민족의 대이동이니, 귀성 전쟁이니 하며, 몇 시간의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두어 꾸러미씩 선물을 손에 들고 차량에 몸을 실어 고향으로 향한다.
객지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는 묻어두고 고단한 여정을 고향이라는 품에 안겨
풀어 버리는 명절을 맞이한다.
이렇듯 즐겁고 편하게만 느껴지는 명절에는 기쁨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이 있다.
어느 해 부터인지 모 여성 학자로부터 이름 붙어진 명절 증후군이라는 근거도, 증세도 애매모호한
신종 유행병이 탄생된 것이다. 명절이 다가오면 몇날 며칠을 쉴 틈 도 없이 방문하는
집안내 손님 치다꺼리에 허리 한번 편히 피지도 못하고 부엌에서 한숨으로 고단함을 삼키던
어머니 대 와는 달리 요즘은 명절이 시작도 되기 전 벌써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 지끈 아프네 하며 본가로 향하는 남편의 걸음을 무겁게 한다.
출발하는 마음이 편치가 않으니 당연히 여자의 몫으로 이어 오던 부엌일에 대해 즐거울 리도 없고
그 불만으로 인해 괜시리 무기력 하고 아프다는 증후군에 시달리는 것이다.
요즘은 많은 남성들이 여성 상위 시대를 떠나 스스로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서
아직도 아들의 부엌 출입을 못 마땅해 하는 여러 어머니의 눈총을 감수 하면서 조차 부엌일을 도와주고 있다. 누군가는 해야 가족이 먹고, 또 자주도 아닌 일 년에 두 번 정도의 시간을 스스로 컨트롤 하지 못해 말 많은 이들이 만들어 놓은 해괴한 신종질환에 자신을 엮어 넣고 집에 돌아오는 길부터 불평에 도를 지나
부부싸움으로 번져 급기야 사네, 안사네 하며 치졸한 신경전을 벌인다. 실제 통계로 명절이 지난 후
이혼율이 명절 증후군의 영향으로 인해 갈수록 증가 한다 하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핵가족 시대에 접어들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될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아직도 유교 적인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 에서는 그리 쉽게 넘어갈 문제는 아닌 듯 싶다.
우리 가족은 다행히 아직까지 형수님이나 아내까지 그 무서운 증후군에 시달리지는 않는 것 같아
다행이다. 나 또한 고루한 성격이어서 부엌일을 도와 준 적이 없지만 자랑할 일도,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무작정 부엌일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없기에 처분만 바란다고 할까?
어정쩡한 자세로 명절을 보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일을 많이 하고, 안하고를 떠나 내 가족을,
그 가족 형성에 중요한 친지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다면 그런 고통은 스스로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 봉사 한다는 거창한 슬로건이라도 괜찮다. 남들은 먹고 즐길 때 준비해야 하고 치워야 하니까
봉사라 해도 무방하다. 봉사는 곧 희생이다. 희생 없이 기쁨은 없을 것이다. 각자의 도시 생활에서
단촐한 살림을 꾸리다 한 번에 엄청난 양의 일을 단시간에 해야 하기에 겁이 먼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심정일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면 슬기롭게 남편의 동참을 이끌어 내던지, 아니면 설득의 묘를 살려
본인의 능력에 맞게 준비하고 내 세우는 현명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예로부터 우리의 어머니가 위대했던 것은 자신을 돌보기전에 가족을 생각하는 그 보이지 않는
배려의 미학이 있었기에 가능 했을 것이다.
옛 성현들을 말씀에 일체유심조 ( 一切唯心造 ) 라는 글귀가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라는
가르침인데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마음을 바꿔 그 상황을 즐기라는 뜻으로 달리 해석할 수 있다.
강요되기 보다는 사랑으로, 희생으로 인내심을 같고 지내면 고통이 기회로 바꾸어 희생에 따른 위대함의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증후군 따위는 힘껏 떨쳐 버리는 평온한 명절을 다 같이 영위 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명한 선택이 필요한 명절이 주는 하나의 교훈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