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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장님 올림픽 이야기

임채군 0 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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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스칠 상은 ‘배드민턴계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1934년 국제배드민턴연맹(IBF)이 창립된 이후 단 열한 명에게만 수여된 최고 권위의 상이다. 그만큼 심사 기준이 까다롭고 엄격하다. 1996년, 한국의 박주봉이 바로 그 상의 주인공이 됐다.

 

박주봉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배드민턴의 ‘역사’다. 배드민턴이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김문수와 짝을 이뤄 초대 남자 복식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또 17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세계선수권 5회를 포함해 각종 국제대회에서 72회 우승하는 대기록을 남겨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2001년에는 배드민턴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한국 배드민턴’을 상징하는 또 다른 이름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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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승승장구-최연소 국가대표 발탁

박주봉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 박명수 씨의 권유로 처음 라켓을 잡았다. 전주 풍남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버지를 닮아 어릴 때부터 키가 훤칠하고 팔다리가 길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독한 체력 훈련을 시켜도 지시를 어기거나 꾀를 부리는 일 없이 성실하게 운동에만 전념했다. 1975년 배드민턴이 소년체전 종목에서 제외되면서 풍남초 배드민턴 팀도 자연스럽게 해체됐지만, 막내의 재능이 아깝다고 여긴 아버지는 배드민턴 명문인 전주 농림고 선수들의 훈련을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이라도 하라고 시켰다. 6학년이던 1976년에는 전국종별선수권 남자 단식에 혼자 출전해 우승하기도 했다.

 

전주서중에 입학하자마자 그는 중3 선배들과 함께 훈련했다. 그리고 출전하는 대회마다 모두 우승을 휩쓸었다. 농림고 입학 첫 해인 1980년 전국종별선수권 남자 단식에서도 파란을 일으켰다. 준결승에서 고교 랭킹 2위 선수를 꺾은 뒤 결승에서도 1위 선수를 이기고 우승했다. 물론 두 선수 다 3학년이었다. 그야말로 군계일학. 박주봉은 결국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박주봉이 있는 한 일본은 한국 못 꺾어”

박주봉이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 치른 경기는 일본에서 열린 제13회 한·일 고교교환경기였다. 한국이 1학년 박주봉을 고교 랭킹 1위 자격으로 내세우자 일본은 격한 불만을 나타냈다. 양국 선수들이 랭킹 순서대로 맞붙는 게 원칙인데, 한국이 일부러 일본 랭킹 1위와 박주봉을 붙여 한 게임을 포기하고 대신 나머지 게임을 다 이기려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박주봉은 압도적인 경기 내용으로 일본 고교 챔피언을 2-0으로 가볍게 이겼다. 일본이 처음으로 ‘박주봉 쇼크’를 받은 순간. 한 일본 배드민턴 관계자는 “한국에 박주봉이 있는 한 앞으로 일본 배드민턴은 한국을 꺾기 힘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착실하게 기본기를 닦은 박주봉은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날개를 달아 국내 1인자로 성장했다. 장신(182cm)에 팔이 길어 수비 범위가 넓고, 네트플레이와 두뇌 싸움의 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었던 그는 이은구와 짝을 이뤄 1982년 봄철대회인 스웨덴·덴마크·전영오픈에 과감히 도전했다. 이은구-박주봉 조는 스웨덴에서 남자 복식 8강에 오른 데 이어 덴마크 오픈에서 한국 남자 배드민턴 사상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세계 최고 권위의 전영오픈에서도 여자 선수들이 모두 초반 탈락한 가운데 남자 복식 3위에 올랐다. 5개월 후 열린 인도네시아 오픈에서 남자 복식 2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복식 3위. 한국 남녀 복식에 세계의 관심 어린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영혼의 파트너’ 김문수를 만나다

박주봉과 복식 조를 이뤘던 이은구의 은퇴가 가까워지자 자연스럽게 누가 박주봉의 새 파트너가 될 지가 관심거리였다. 이때 박주봉을 복식으로 이끌었던 대한배드민턴협회 김학석 부회장이 원광대 김문수를 추천했다. 키(180cm)가 크고 왼손잡이에 파워까지 갖춘 김문수는 오른손잡이 박주봉에게 최적의 파트너였다. 둘 다 유럽 선수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체격 조건. 판단력이 뛰어난 박주봉이 앞에서 현란한 네트 플레이를 펼치고, 서브가 좋고 스매싱이 강력한 김문수가 뒤에서 상대 코트를 유린하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박주봉의 빈틈없는 성격과 김문수의 털털한 성격도 조화를 이뤘다.

 

박주봉은 1983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월드컵 배드민턴선수권에서 처음 김문수와 함께 남자 복식 우승을 차지했다. 역대 가장 환상적인 복식조의 출발점. 이때부터 10년간 파트너로 이루며 각종 국제대회를 휩쓸었다. 중국의 리용보-티안빙 조가 이들의 유일한 라이벌이었지만, 침착하면서도 과감한 경기 운영으로 번번이 제압했다. 기네스북에 오른 박주봉의 국제대회 우승 기록은 대부분 김문수와 함께 일궈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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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의 순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박주봉과 김문수는 이미 세계 정상의 콤비임을 여러 차례 확인한 후였다. 당연히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첫 경기에서 중국의 쳉캉-쳉홍용 조를 만난 이들은 1세트를 11-15로 내줬다. 몸이 덜 풀리기도 했지만, 상대를 너무 얕잡아본 게 실수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2세트를 시작했지만, 기세가 오른 상대의 페이스에 눌려 고전을 거듭했다. 간신히 기력을 회복하고 반격에 나서 2세트(15-5)를 만회한 후 3세트를 15-9로 이겨 간신히 다음 라운드에 나섰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의 기량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복병이 튀어나올 수 있고, 반대로 우리 전력은 노출됐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후에는 거칠 게 없었다. 8강전에서 메이기니-수방자(인도네시아) 조를 2-0(15-7·15-4)로 가볍게 제압했다. 준결승에서도 배드민턴 가족으로 유명한 말레이시아의 시덱 형제를 접전 끝에 2-0(15-11·15-13)으로 물리쳤다. 결승 상대는 인도네시아의 하르토노-구나완 조. 이들은 박주봉과 김문수가 올림픽 준비로 국제대회 출전을 자제하는 동안 각종 대회 우승을 휩쓸던 다크호스였다. 이미 한국이 결승전 상대로 예상했던 중국의 리용보-티안빙이 조를 2-0으로 제압하고 결승에 올라온 참이었다.

 

두 팀의 대결은 호각지세였다. 그러나 박주봉의 신기에 가까운 네트 플레이와 김문수의 강력한 스매싱은 세계 정상의 무기였다. 하르토노와 구나완이 받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세트 초반부터 폭발적인 공격으로 상대를 몰아붙인 박주봉-김문수는 13-5에서 잠시 방심해 6점을 연속으로 내주며 2점 차까지 추격당했다. 하지만 금세 페이스를 되찾았다. 15-11로 끝. 2세트에서는 박주봉-김문수 콤비의 완벽한 공수 호흡에 상대는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15-7로 졌다. 2-0 완승. 마침내 박주봉과 김문수가 올림픽 배드민턴 남자 복식의 첫 월계관을 쓴 것이다.

 

위기를 딛고 일어났기에 더 값졌다. 올림픽을 불과 1년 여 앞두고 둘 다 훈련 도중 부상을 입었다. 박주봉은 아킬레스건, 김문수는 어깨에 각각 탈이 났다. 하지만 대회 직전까지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며 강도 높은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체력을 보강했다. 6개월 동안 하루 6시간 이상 땀을 흘렸고, 스피드를 높이기 위해 모래사장을 하루 1시간씩 뛰기도 했다. 당사자들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오래 함께 국가대표를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신기해할 만큼 손과 발이 척척 맞았던 파트너. 10년간 세계선수권과 전영오픈 등 최고 권위의 각종 국제대회에서 ‘출전하면 우승한다’는 전설을 만든 콤비. 이들의 마지막이 올림픽 금메달로 장식된다는 건 가장 감격스러우면서도 당연한 시나리오로 여겨졌다.

 

이들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이후 나란히 은퇴했다. 1993년 영국에서 열린 세계혼합단체선수권에 참가하기 위해 잠시 컴백하기도 했으나, 다시 각자 지도자의 길로 떠났다. 물론 은퇴 후의 영광도 함께 누렸다. 2001년 박주봉이 국제배드민턴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데 이어 김문수도 이듬해인 2002년 명예의 전당에 뒤이어 올렸다. 두 영웅의 사진과 현역 시절 사용하던 라켓이 영국에 있는 명예의 전당에 영구 전시됐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호령했던 세계 최강의 복식조의 공로를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박주봉은 이후 한국체육대학에서 조교 생활을 하다가 1995년 10월 다시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한국의 금메달을 위해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혼합 복식에 출전해달라는 협회의 간곡한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3년 가까운 공백에도 불구하고 녹슬지 않은 실력을 자랑한 박주봉은 한국체대 제자인 라경민과 호흡을 맞춰 1996년 전영 오픈과 지바 아시안컵을 비롯한 출전 대회마다 혼합 복식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올림픽에서는 후배 김동문-길영아 조에게 결승에서 져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배드민턴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다

박주봉은 배드민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자국 선수들 못지않은 스타였다. 팬들은 물론 다른 나라 여자 배드민턴 선수들도 박주봉에게 러브레터를 보내곤 했다. 또 국제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체육관 앞에서 ‘주봉 버거’, ‘주봉 주스’, ‘주봉 아이스크림’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특히 말레이시아에서는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국제대회가 자주 열려 박주봉도 말레이시아를 찾을 일이 많았는데, 그 때마다 국민들의 희망이던 5형제 배드민턴 국가대표 시덱 형제를 가볍게 꺾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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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박주봉에게 각국의 지도자 제의가 쏟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1996년 영국 배드민턴 협회가 박주봉에게 ‘1주일에 두 차례 국가대표팀을 지도해주면 박사 과정 학비 전액과 생활비,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결국 그는 1997년 2월 한국체육대학교에 사표를 내고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에서 대표팀을 지도하면서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스라엘 등 이웃 나라에 배드민턴 순회 지도를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2년 후 다시 말레이시아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그가 콸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하자 40여명의 취재진이 몰렸고 신문마다 ‘박주봉이 왔다’고 대서특필했다. 이후 박주봉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팀 코치로 잠시 국내에 복귀했다가 다시 일본 국가대표팀을 지도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심 끝에 일본으로 떠났다. 이후 지금까지 일본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도 일본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참가할 예정이다.

 

 

 

참고문헌: 송수남, [배드민턴은 나의 인생], (국민체육진흥공단, 2002)

 

 

 

배영은 | 스포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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